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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꼴라쥬
"사람은 시인으로 이 땅에 산다" (dichterisch wohnt der Mensch). 시를 짓는 것이 단순히 헤매는 것이 아니고 건설을 통해 방황을 끝내는 것인 한, 시는 사람이 이 땅에 살 수 있게 해준다. 그러려면 언어와 나의 관계가 바뀌어야 한다. 언어가 말한다. 그때 사람은 언어가 자기에게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언어에게 답한다. 그래서 훨덜린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시인으로 이 땅에 산다." 하늘과 신을 향한 마음과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실존 사이에 긴장이 유지될 때, 사람은 비로소 산다는 것이다. 시는 시를 짓는 재주 이상이다. 포이에시스(poiesis), 곧 창조이다. 가장 넓은 의미의 창조이다. 그런 뜻에서 시는 본래의 삶이다. 사람은 시인일 때만 산다. (폴 리쾨르, 해석의 갈등,..
어렸을 적부터 언어는 나에게 장난감같은 유희의 대상이었다. 모든 이에게 놀이기구가 친숙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그것에 탑승시켰을 때는 엄청난 낯설음이 체험되어지며 또 그 체험을 즐기는 것처럼, 나또한 친숙한 언어로부터 낯섦을 체험하며 은밀히 즐거워하며 살아왔다. 세살 무렵부터 내가 언어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고 부모님은 일찍이 알려준 적이 있다. 언어는 참으로 큐빅과도 같아 그것을 끼릭끼릭 돌리고 비틀어 조합하다 보면, 참으로 신기한 모양을 취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큐빅을 정말 못 하는데, 큐빅은 언제나 한 개의 종착역만을 목적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나는 멀미를 느낀다. 하나의 목적점만 있을 뿐이라는 사실은 대단한 억압감과 강압을 수반하는 까닭이다. (지금 브라운관 속에선 우주전쟁의 트라이포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