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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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어려운, 단순함의 지혜

jo_nghyuk 2019. 2. 13. 18:04

어제는 저녁기도회에 세 명이 참여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중국인 친구가 기도회에 참여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다. 안나 아말리아 도서관에서 헬라어 해석을 하는데 독일어로 헬라어를 배워서인지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아침에는 헬라어 파싱(해석)을 하며 보내고 오후에는 주석 책을 참고하기로 했다. 문법적으로 까다로운 부분이 두 군데가 있었는데 충분히 시간을 기울이니 번역 성경이나 주석 책을 참고해서만은 알 수 없는 언어의 오묘한 뉘앙스 같은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문득 신대원 시절에 주석이나 번역본을 보지 말고 스스로 파싱하는 습관을 무엇보다 먼저 기르라는 교수님의 말이 떠올랐다. 많은 것을 참고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출발점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텍스트가 자아로 환원되지 않도록 연구하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하루를 들여 준비한 15분의 설교이지만 세 명에게 들려주어도 아쉽거나 하지 않았다. 이미 준비하면서 은혜를 누렸기 때문일까. 그렇게 저녁기도회를 마치고 다음날 아침기도회를 인도할 구절들을 읽고 잠들었다. 5-6분 정도의 분량으로 기차에서 요지를 작성했는데, 예상치 않은 일련의 사건들을 만나면서, 더 성심으로 준비해야겠다는 반성을 했다. 중국인 친구가 참여하니 간단하게 모국어로 전하려던 설교를 영어로 10분 정도 전해야 했다. 아침이어서인지, 독일어만 써서인지, 영어가 생각처럼 나오지 않았다. 평소에 쓰던 것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법이다. 그걸 작년 라틴어 구두시험 때 깨달았다. 시간을 충분히 들이면 누구나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짧은 순간에 당장 나오는 것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 자연스럽고 익숙한 것들이 나오는 법이다. 충분히 시간을 주는 필기시험과 달리 30분만 준비하는 구두시험 때 나는 제대로 된 답변을 거의 하지 못했다. 어쩌면 오늘 아침도 영어로 전해서가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는 이 설교가 말하는 텍스트를 참으로 내 것으로 만드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음에 있을지 모른다. 사람이 많이 참여하는, 그리고 15-20분 전하는 설교는 준비시간이 길고, 사람이 적은, 5분 전하는 설교는 준비시간이 짧아도 된다는 생각은 불충한 자세 아닌가. 그걸 글로 푸는 행위를 나는 새벽기차에서 해버렸던 것이다. 불과 어제 심판하실 주님을 기다리며 정직하게 살자는 설교를 전한 사람이, 아침에 정직한 본이 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불충함과 태만함에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스스로의 안주함에는 어찌 그다지도 눈을 감고 지나가는 것인가. 

담백한 삶에 대해서, 단정한 태도에 대해서, 건전한 사상에 대해서 고민하는 요즘이다. 참으로 몸가짐과 삶의 자세가 단정하지 못하면, 그의 생각도 건전하지 못한 법이다. 마음가짐을 올바르게 해야 행동도 따라오고 생각도 단정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본회퍼가 <윤리학> 2장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단순한 지혜"는 그러한 것이다. 굳이 학식을 쌓으려 하지 않아도, 그리스도가 그의 가운데 충만하게 역사하는 이의 시선은 명징하며, 사상은 건전하고, 삶은 담백한 법이다. 그에게는 뱀의 복잡성이 없고, 비둘기의 순결함이 빛날 뿐이다. 그러나 모든 복잡성은 단순성 안에 놀라운 통찰력으로 통합되어 있다. 이러한 단순한 총명함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나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 될 때 그 단순한 지혜, 통찰력이 내 것이 된다. 이것이 어찌 나 자신의 삶의 정직함과 구분되어질 수 있는가? 똑똑한 바리새인은 도처에 널려있다. 그러나 참되게 지혜를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순금처럼 희귀한 법이다. "사람은 정직한 길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저마다 자신의 길로 구부러지기를 더 좋아하며 선한 것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찾고 싶다면,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찾고 찾으라. 그러면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참된 지혜는 실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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