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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5일의 수기, 덧없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것이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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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5일의 수기, 덧없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것이다

jo_nghyuk 2019. 4. 5. 18:46

아우구스티누스를 연구하면서 중세 시대 신학자/철학자들의 아우구스티누스 주해를 함께 보는데, 오늘 발견한 인상깊은 부분은 "흘러가는 시간은 비존재가 아니라 연약한 존재"라는 말이다. 봄에 피는 벚꽃을 보며 일본사람들은 아름다움과 덧없음을 함께 생각한다고 한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꽃잎들이 피자마자 땅에 떨어지는 것, 그 덧없는 아름다움이 일본사람들의 정서라고 나에게 일본인 교수님께서 말해주신 일이 있다. 

그렇다면 봄이야말로 가장 덧없는 계절이 아닌가. 열매가 빨갛게 익는 뜨거운 여름도 아니고 원숙해지는 차분한 가을도 아닌것이 그저 피었다 지는 꽃들로만 가득한 이 계절의 의미는 도대체 무얼까. 엘리엇의 표현과는 달리 4월은 잔인한 계절이 아니다. 겨울과 달리 고통의 계절도 아니고, 그저 생소한 새 생명으로 가득차는 계절이 봄이라고 하는 계절이다. 

나는 이전에 수강신청을 고민하다가 환상을 본 일이 있다. 환상을 별로 보는 편이 아닌데, 영성수업과 몰트만 신학수업 중에 고민이 되어 기도하는 중에, 몰트만 수업을 놓고 기도하다가 동산이 풀과 꽃과 나무와 시냇가로 가득하게 되는 풍경을 보게 되었다. 당시 몰트만을 가르치던 교수님은 기도의 사람이었고 나는 교수님과 이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대를 이루었다. 생명을 살리는 신학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바르트는 모든 약한 것들과 눈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학을 개진한 몰트만에게 편지에 이렇게 썼다: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작습니다" 그러나 단단한 바르트와 부드러운 몰트만의 간극을 잘 알고 있는 나, 그 양극단을 (주의 은혜로) 로프반동하는 애송이 신학자인 나는 바르트의 신학의 양상과 몰트만의 신학의 양상은 다른 세계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베드로가 요한에게 이렇게 꾸짖는 격이다: 당신은 왜 죽으러 가지 않습니까? 베드로의 생의 양상이 다르고 요한의 그것이 다르지만, 하나님을 향해가는 신자의 벡터값은 늘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이다. 

그래서 연약한 자들을 지켜주기 위해서 나를 단단하게 하시는 주님의 뜻을 최근에 읽어내려가는 중이다. 청지기는 정직해야 하고, 순수해야 하고, 깨끗해야 한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언제나 충성이다. 나야말로 주의 긍휼의 필요한 작은 사람이지만, 기도회 시간마다 깨닫는다. 당신은 나를 먼저 강하게 하시고, 다른 많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 나를 부르신다. 나는 청지기다. 청지기로서의 사랑은 금강석과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봄의 시간을 덧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치임을 된다. 자꾸 움켜쥐려 하면 덧없는 것만 보인다. 그러나 흘러가는 강물처럼, 시간처럼, 벚꽃처럼, 오늘 나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을 보면 움켜쥔 손을 펴고 감사하게 된다. 집착은 붙잡고 노예가 되지만 희망은 내어드리고 누린다. 나는 금강석 같은 사랑을 단련하고 싶다. 

오늘은 몰트만을 그리는데, 시간을 한참 들여서 고쳐가며 그렸다. 바르트는 한 홉에 그렸는데, 몰트만에 대한 나의 애정이 꽤 큰가보다. 내 인생의 제 1동력은 사랑이다. 사랑은 꽤 귀찮은 것을 해내게 하고, 고통스러운 길을 기어이 감수한다. 사랑은 효율성의 반대말이고, 꽤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이긴다. 아니 이기고 짐에 상관없이 그리로 흐르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몰트만은 "자유는 사랑을 향한다"고 말했다. 봄이 오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무엇도 막을수 없다. 나는 덧없지도, 연약하지도 않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언제나 나는 모든 역사의 최전방에 서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겨울을 지나 오는 봄을 기다리며 나는 사랑을 향해 서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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