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4월 14일의 수기, 삐뚜루 선 자명등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4월 14일의 수기, 삐뚜루 선 자명등

jo_nghyuk 2019. 4. 14. 15:57

일어나서 기도와 묵상을 하고, 해가 4-5센치 올라갈 때까지 멍하니 풍경을 바라본다. 머리를 디폴트값으로 만드는 시간이다. 그러면서 이번에 교토에 가도 특별한 일이 없이 어슬렁거리겠구나, 하고 생각한다. 나의 지도교수님도 나처럼 나사가 하나 빠진 스타일이어서 둘이 있으면 참 편하다. 말도 안되는 농담으로 서로 한참을 웃고, 말도 안되는 은유와 비유와 언어유희의 극단을 달린다. 그러다가 연구주제라든가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만 순간적으로 서로 진지해지고, 다시 헛소리로 돌아가는 패턴이다. 

그림을 그릴때 나는 그런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전체적인 소묘라고 할까, 그런 것을 할 때는 지나치게 구조적이어서는 곤란하다. 그냥 내가 바라보는 인상 자체를 담아와야 한다. 그리고 나에게서 나오는 선을 믿어야 한다. 그 선이 내가 생각하는 선이 아닐수도 있고, 내가 원하는 선이 아닐수도 있다. (뭐 대체적으로 그럴 때가 더 많다) 그럼에도 지금 내가 끌어내는draw 그 선이야말로 거미가 입에서 자기 본연의 것만을 직조하고 자기 본연의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듯이 가장 나다운 것임을 믿고, 바라보고, 인정해주고, 화해해야 한다. 약간 철학적인 얘기를 하자면, 그 선을 끌어내는 본연의 수행자agent가 있고 그에 대해 반성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관조자conciousness가 있는 것인데, 그 둘이 대화도 하고, 때로 투쟁도 하고, 화해도 하면서, 관조자는 나온 선을 다시 구조화하고, 수행자는 자기의 평론가가 하는 말을 듣고 재정향reorientiert werden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때로는 수행자가 더 목소리를 내고 싶을 때도 있고, 관조자가 윽박지를 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수행자와 관조자가 가장 온화하게 대화했던 화가로 모네를 들고 싶다. 그의 그림을 보면 수행자는 관조자가 되고 관조자는 수행자가 되는 것 같다. 그야말로 사랑이 많은 화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반대로 관조자가 강했던 불쌍한 화가는 드가라고 할수있다. 자신의 평론가가 목소리가 강할수록 수행하는 자기 자신은 그런데 역설적으로 더 뜨거워진다. 재밌지 않은가? 자신을 통제하는 힘이 강할수록 그에 대응하는 그 속의 뜨거운 것도 더 거칠어지는 것이. 차라리 모네는 약삭빠르다. 조용히 그리고 차분히 정열을 다독이는 방법을 취한다. 그리고 그 뜨거운 것들이 아직 파스텔처럼 온화하고 저녁노을의 초동처럼 덜 불거져나왔을때 그 상태에서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모네는 따뜻하고, 드가는 차가우면서 뜨겁다. 자연스러운 모네와 삐걱거리는 드가. 난 둘 다 사랑한다.

사실 난 드가에 더 애착이 간다. 난 삐걱거리는 것들에 마음이 더 간다. 한쪽 다리가 짧은 의자, 아무리 조여도 자꾸 풀리는 왼쪽 안경다리, 솜이 삐져나오는 헤드폰, 고쳐도 고쳐도 끊어지는 시계줄(난 기어이 비엔나까지 걔를 들고가서 고치고 말았다). 사실 얘들은 고쳐도 고쳐도 그 자리 그대로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가고 고치게 된다. 고쳐진 온전한 상태를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장나고 불완전한 그 상태에서 내가 이미 그것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일드 오렌지데이즈를 다시 보고 있는데, 거기에는 결핍을 하나씩 안고있는 젊은이들이 등장한다. 귀가 들리지 않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있는가 하면, 소설가가 되고 싶지만 재능이 없는 매우 평범한 청년이 있다. 모네처럼 자신의 불안한 열정이 온화하게 조율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만은,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 아니던가. 저녁노을은 결국 왈칵, 쏟아질 것이고, 파스텔은 부숴질 것이고, 곤죽이 되고 말 것이다. 

주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다는 말은, 그래서 사람이 정열과 믿음을 둘 곳이 한 방향뿐임을 의미한다. 괜찮은 척 매끈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라, 가장 거칠고 투박하며 어리석은 모습을 내어보이고, 차라리 낮아져서 거기부터 솔직하게 시작하는 것이 주와 동행하는 길이다. 거기에 정말 모든 것을 다 걸고 갈때, 사람은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해 자유해진다.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때문이다. 더이상 호흡과 먼지로 이루어진 사람들에게 권위와 권세를 두지 않는다. 그는 가장 높이 상승한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에서 웃는 얼굴로 기어다니는 자유를 누린다. 나의 관조자는 더이상 나를 통제하지 않고 사랑의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의 수행자는 더이상 불안해하지 않고 사랑받는 이로서 마음껏 선을 그릴 것이다. 주가 없을 때에는 관조자도 통제하느라 바쁘고 수행자도 눈치보니라 여념이 없었는데, 주가 계시니 반성적 의식이나 즉자적 의식이나 자유 가운데 마음껏 생명을 발산한다. 오, 사랑.

조금은 삐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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