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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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4월 11일 수기, 슬슬 가볼까나.

jo_nghyuk 2019. 4. 12. 00:15

이전에 사역을 열심으로 하다가 뜨겁게 달궈져 팬소음을 내는 노트북처럼 될 때마다 담임목사님은 나라는 뜨거운 몸뚱아리를 근처 하와이안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서 우클렐레 연주를 들으며 함께 천천히 식사를 하시고, 카페에 데리고 가서 핸드드립 커피를 또 한동안 천천히 마시는 시간을 꼭 마련해주셨다. 그러면 흥분했던 나는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하고, 다시 내가 먼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노트북이 쿨다운하는 시간. 어쩌면 나의 이번 학기는 지난 뜨거웠던 2년의 유학생활 시간과 매우 상반된 쿨링타임이 될지도 모르겠다.

슬램덩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윤대협이다. 그가 얼마나 느긋하고 여유로운지 그의 원이름인 '센도 아키라'의 '센'은 '신선'이라는 뜻이다. 이노우에는 이 캐릭터가 밸런스를 뭉개버리는 사기캐라고 싫어했다지만, 나는 그의 느긋함이 가져다주는 넓은 시야에 동감하는 바이다. 너무 뜨겁게 돌리기만 하는 노트북은 금방 고장이 나거나 눈이 멀듯이 모니터가 나가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뜨거움에는 차분함이 상존해야만 한다. 나는 폭주하는 폭발감을 사랑하지만 차분한 것들을 또한 사랑한다. 아니, 나는 차라리 두가지가 상존하고, 병존하며, 교차하는 순간을 사랑한다. 그래서 뜨거운 한여름에 비내린 후 저녁 공기를 마실때가 나는 가장 행복하다. 뜨거움과 시원함이 공존하는 그 찰나의 순간 말이다. 나는 수줍게 오징어 춤을 추는 순간의 톰요크를 사랑하고, 어눌하게 독일어를 하는 순간의 멜다우를 사랑한다. 물안개처럼 뜨겁게 확장되고 차갑게 바스라지는 제프버클리는 또 어떠한가, 말끔한 얼굴로 찬란하게 작열하는 순간의 보스트리지도 좋다. 늘 누구보다 뜨거운 것을 남몰래 품던 드가를 사랑하며, 폭풍같은 타건 뒤에 찾아오는 전혀 다른 얼굴의 리스트의 조용한 터치도 사랑한다. 나는 불가능한 것들이 가능해지는 순간을 사랑한다. 어찌보면 나는 몽상가와 같고, 이 세상에서 추방되어야 하는 미래파 시인들과도 같다. 

윤대협은 정말 중요한 순간에 눈빛이 변한다. 이를테면 메시가 걸어다니는 공격수인 것처럼, 그는 분주하게 뛰는 법이 없다. 늘 느긋하고, 늦잠을 자서 시합에 늦기도 하는, 얼핏보면 신선 또는 한량 스타일이다. 그러나 그는 정말로 중요한 순간을 위해 걸어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너무도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위해 이유도 모른채 분주하게 뛰고 있는 것은 아닐지. 박노해 사진작가는 그렇게 분주하게 뛰는 군상의 모습을 '달려라 죽음'이라고 표현했다. 분주하기만한 삶은 시간을 저 멀리 끝으로 밀어버리고 지금이라고 하는 시간의 향기를 맡지 못하게 한다. 시간은 순간순간의 연속인데, 바쁜 삶은 순간들을 건너뛰고 어서 모든 시간의 총합을 이루어 저 끝에 가닿기를 원한다. 그러나 무얼 재촉하는가? 시간의 끝에는 죽음이 있을 뿐인데. 

나는 윤대협이 포인트가드이며 올라운드플레이어라는 점도 맘에 든다. 그는 한마디로 사기캐이다. 어떻게 전체 그림을 조망하면서도 세부적인 달리기들을 병행할 수 있을까. 팀의 득점과 개인의 득점은 여기서 재즈처럼 혼재한다. 그래서 그는 슬램덩크의 밸런스를 파괴하는 기이한 존재로서 작가의 미움을 받는다. 그러나 나는 윤대협이 폭발하는 순간이야말로, 그가 낚시를 하고, 늦잠을 자고, 시합에 늦고, 여유를 부리고, 느긋하고, 태평한 모든 순간들이 부풀어오르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차분해보이는 사람이 가장 뜨겁고, 태평해보이는 사람이 가장 치열하게 되는 그런 순간. 저녁 어스름이 오는 동시에 태양이 곤죽이 되며 온 세계의 상을 벌그렇게 물들여버리고야 마는 그런 광기의 시간. 나는 그러한 순간을 사랑하고, 그러한 순간없이는 텁텁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힘든 사람이다. 

프랑스어반을 신청하고 오면서, 정말 이런 삶을 살아도 되는가. 하는 생경한 감각도 들었다. 대체 나에게 어디까지 허락되는 것이지? 영적으로 매우 날이 서있다가도, 나는 재즈 얘기가 나오거나 하면 금세 어린아이로 돌아와버린다. 그런데 나는 이런 온도차의 공존이 참 좋다. 나는 피조물로서 나의 피조물됨을 향유하고 있는 중이다. mercy, mercy, mercy. merci, merci, mer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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