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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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일의 수기, 아픔

jo_nghyuk 2019. 6. 21. 05:53

어깨가 많이 뭉치고 편도선이 부었다. 의지적으로 도서관에 안가고 집에 돌아왔다. 수요예배를 마치고 목이 간당간당하다 느꼈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쇼트가 온 메인보드처럼 뭔가가 끊어진 것만 같다.

태생적으로 느린 리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어찌하다가 꼭 리듬이 조급하게 엉켜서 몸이 고생한다. 효율보다 사랑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되뇌이면 뭘하나. 다음 주부터 또 한 달간 연구를 멈춰야 하는 일이 생겨서 현재 진행하는 것의 매듭을 짓고자 기어를 올렸었는데 차가 퍼져버린 느낌이다. 

내 몸을 다루는 방식은 먼저는 가족을, 다음으로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내 몸은 타자로서의 나이다. 내 몸은 나와 협력하는 공간적 체계이다. 내가 조심해주지 않으면 그들은 나의 고집스러운 장력에 무력하게 끌려올 것이다. 좀 더 꽃처럼 다루어주어야만 한다. 

그러니까, 사랑만이 변화시키는 게 맞는데, 사랑이 효율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느리다는 것이다. 

느리다는 것이다.

우둔한 나여, 타자성은 느림이다. 타자의 느림을 인정하지 않을 때, 마음은 딱딱해지고 귀는 멀게 될 것이다. 네 자신의 타자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 출발점이리라. 

몸이라는 타자적인 공간에 나는 박혀 있다. 그렇게 나는 연약함이라는 타자성을 익혀간다. 내 몸의 약함을 아시는 주, 라는 말은 주가 십자가를 통해 그 약함을 자기 자신 안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신이 약함을 자기 자신 안으로 받아들일 때 신의 고난이 시작된다. 한마디로 신의 약함은 인간과의 관계성 때문에 초래된 것이다. 그는 초월성으로서의 타자성에 완벽히 머물 수 있었지만, 관계성으로의 타자성으로 내려옴으로써 모든 약함과 고통을 자기 자신 안으로 수용한다. 

그래서 사랑만이 길이다. 

사랑은 변화를 꾀하지 않는다. 사랑은 둘이 만나 이루는 굴곡진 길을 추구한다. 사랑은 꾸짖지 않는다. 사랑은 요청하지 않고 내어준다. 그래서 사랑은 침묵이다. 사랑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상대방을 향하고, 상대방을 위한다. 

오히려 인간의 숙제는 좀 더 안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불안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존재다. 어째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비존재에서 왔기 때문일 것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비존재에서 왔기에 비존재로 기울어지는 것이 불안이다. 그러나 그 기울어지고 어그러진 것을 통합하는 것은 오직 신적인 사랑 뿐이다. 

사랑은 애쓰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나여, 아파하는 나여

애쓰지 말고 믿어야 한다. 배송에는 시간이 걸린다. 기다려 보자.

시간은 신의 인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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