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7월 11일 수기, 천천히 per favore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7월 11일 수기, 천천히 per favore

jo_nghyuk 2019. 7. 15. 03:31

나폴리에서 로마로 향하는 기차에서 라디오헤드 라이브 부틀렉을 오랫만에 꺼내 듣는다. 나이가 들면서 좀 더 차분한 곡들 위주로 듣는 스스로를 본다. 지나치게 울적하거나, 지나치게 광적이어서는 곤란하다. 메트로놈이 좌로나 우로나 요동치는 것이 피곤하기 때문이다. 점점 부드럽게 곡선을 그어주는 리듬이 좋아진다. 

나와 라디오헤드의 인연은 대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우울감에 허우적대는 룸펜이었고 레코드샵에서 처음 산 라디오헤드 카세트테이프가 ok computer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당시에는 exit music이나 no surprises 같은 곡들이 좋았다. 슬퍼함을 끝까지 몰아갈 수 있는 맹목적인 그 어떠함에 천착하던 세대였고 다음으로 나는 스탠리 던우드가 디자인한 붉은 커버의 amnesiac 테이프를 사서 들었다. 골방에서 친구와 the bends를 수천 번은 시끄럽게 돌려 들었던 기억도 난다.

나는 내질러 달리는 톰 요크의 행보를 좀체 따라잡지 못하는 느린 청취자에 속한다. 내 진도로 말하자면 3-4년 정도가 항상 늦다. 앨범이 나올 당시에는 거의 듣지 않다가 그 다음 앨범이 나올 즈음에 그 전 앨범에 겨우 적응이 되어 즐기기 시작하는 편이다. 친구와 함께 간 일본 공연의 set list도 그런 식이었다. 우리는 예상을 깨버리는 선곡의 연타를 맞으며 땀범벅이 되었고 오사카의 위험한 뒷골목에 위치한 호스텔의 낡은 공용 욕실에 들어가 루저스럽게 몸을 씻고 잤다. 

이 놈의 밴드는 정말이지 내 기대지평에 들어와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 천재들의 조각상이나 광장이나 돔 따위의 설계들을 보면서 거장들이란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보다 몇 차원의 더 많은 층위를 가지고 있고 또 결합해내는 인물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 관람을 갔을 때에도 이들은 말도 안되는 다음 앨범 곡들을 기존의 곡들의 리스트와 꼴라쥬해서 연주하는데 전체적으로 진보-지진아인 나는 이 때도 멘탈이 아작이 나는 경험을 했다. 내 기억에 그 때 톰은 솔로 앨범을 내었고 최근에도 솔로 앨범을 냈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어디 서정적인 곡은 없나 하고 앨범을 후비적거리는 딱한 동일자이다. 

재즈를 듣고 십수년이 되서야 키스 쟈렛이 피아노를 치면서 흠흠흠, 끄아암 하는 게 그다지 거슬리지 않게 되었다. 이탈리아 여행이 끝나서 다시 프랑스어로 복귀해야 하는데 시차적응이 쉽지 않다. 

로마의 쿠플라를 보고 자신이 실패했던 피렌체에 다시 돌아간 어느 느린 건축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