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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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9월 20일의 수기, ( )

jo_nghyuk 2019. 9. 21. 00:38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삶은 참 외롭고 슬프다. 다른 이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데 '먼저 네가 가면을 벗어야지' 하고 말하신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단순하게 대답한다. 그러나 재차 물어보신다. '정말 그러기를 원하니?' 질문의 내용과 상관없이 물음의 중첩은 나를 베드로처럼 주춤하게 만든다. 그 뒤에는 통상적 이해를 넘어서는 무거운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면은 꾸미고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가면을 벗는 것은 페르소나를 벗는 것이다. 단단하고 견고한 동일성의 자아가 철저히 무너지는 경험을 하는 것. 더 이상 어떤 위상도 점유할 수 없으며 무력하게 무대에서 내려와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가야 함을 의미한다. 가면은 빛을 반사하는 얼굴 있음의 상태이다. 그러나 가면을 벗는다는 것은 본연의 얼굴로 돌아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얼굴을 가지지 못하는 상태를 지나야 함을 의미한다. 시간적 존재에게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은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우리는 프로이트를 통해, 의식의 고고학 작업의 길에서 이미 마주하였다. 

가면의 벗음은 가리워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포기이다. 허약한 텅 빈 실상이 노출되고, 그에 대한 어떤 안정제도 진통제도 없다. 스스로의 위상학적인 맹점이 드러나고, 내가 점유한 지평의 파편성이 폭로되는 것은 한 마디로 고난스러운 경험이다.

우리를 사랑할 필요가 없을 때 사랑하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는 삶은 사랑으로의 초대이며 벌거벗음으로의 밀어넣음, 광야로의 떠밀려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자유이며 선택이다. 역설적이지만 무능력 가운데에서 능력을 체험했다는 바울의 말은 피가 흐르는 변증법이다. 

우리는 가난하나 너희는 부요하며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세상의 찌꺼기 같은 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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