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10월 30일의 수기, 순수함과 처참함 사이에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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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0일의 수기, 순수함과 처참함 사이에서

jo_nghyuk 2019. 10. 30. 23:53

논문을 쓸 때면 깊은 숲에 들어와 있는듯한 고요함을 느낀다.

실제로 이 장소는 깊은 숲과 같다. 삼나무처럼 곧고 지긋한 책들에 둘러싸여서 천천히 산을 오르듯 후설의 사유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적막함을 넘어서 고요함이 시작되면 내 영혼은 잠잠하게 빛난다. 

늘 고요하게 내달리지는 못한다. 특별히 사람을 만나야 할 때 그렇다. 그럴 때마다 집 밖으로 달려나가지 못하는 큰 개처럼 끙끙거리곤 한다. 그런 나를 창조주는 무척이나 섭하게 여긴다. '자, 이제 제 일을 해야지요'라고 말하는 나에게 늙은 어머니만큼이나 서운해하시는 것이 느껴진다. 나의 것을 주장할 수록 당신이 머물 공간이 내 안에서 줄어든다. 선물로 받은 시간이 허다한데도 그 빈 공간을 스스로의 것으로 채우려고 고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항복하기 전까지 행복하지 못하다. 비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것을 주장하는 순간,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어도 그 작은 것 하나로 인해 자기 실존이 속한 세계 전부가 일그러지는 것을 겪어야만 한다. 그의 세계는 창조주의 것이며 그는 청지기로서만 그 세계에 대하여 서있다. 희극을 추구하면 비극이 되고, 비극을 추구하면 희극이 되는 것이 그의 시간내용이다. 그리스도인 실존은 스스로 추구하는 바로 그것 때문에 퇴락하고야 마는, 기이한 벡터값을 가지는 존재다. 그의 시간방향은 다른 이들이 지향하는 바와 늘 반대방향으로 겨누어져 있다.

깊은 산 속에 들어가 두 돌판을 받은 모세는, 처참한 산 밑의 현실성으로 다시 내려가야만 했다. 그 우상숭배의 광경이 어찌나 처참하던지 그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그 순수한 두 돌판을 던져서 깨어버리고 말았다. 순수한 야훼와 모세는 우상숭배자들을 배제하고 살 수 있었음에도, 수고로이 두 돌판에 그들의 순수함을 다시 새기는 삶의 방향을 택하였다.

그리스도인 실존은 깊은 산 속의 순수성과 산 아래에 우상숭배자들의 처참함 사이를 끊임없이 진자운동해야만 한다. 그게 이 땅의 고난이고, 시간성의 비극이며, 그럼에도 비극이 희극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불가능한 것을 꿈꾸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종교인의 범주에 박혀 있다. 둘 사이를 부단히 내달리게 하는 것은 그러므로 열정이 아니라, 헌신일 것이다. 스스로 겨눔이 아니라, 항복되어 겨누어지는 것. 주어가 아니라 술어가 되는 것. 관념 속의 존재가 아니라, 움직임 속에 있는 실존이 되는 것. 

동시에 본향home을 늘 기억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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