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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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10월 18일의 수기, Ent-Spiritualisierung

jo_nghyuk 2019. 10. 18. 02:56

느리게 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느린 시간을 보내야만 했었던 걸까? 그것이 어쩔 수 없음이었다면, 그것은 변명이 아닐지는 모르나, 허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 고치를 탈피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온도가 쌓이며 나를 품어야만 했는가. 분명한 것은 그 품어짐으로 인해 나도 다른 허물들을 조금이나마 품는 법을 배우고, 느리지만 함께 그 시간을 통과하는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 애초부터 잘 달리는 경주자였다면 주위를 둘러보는 긍휼이 내 안에 싹 틔울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지금의 시점은, 이러저러함의 시덥잖음들을 조금은 시원하게 벗어던질 때라는 것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느리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속도를 찾고 싶었다. 나는 느린 사람인가, 빠른 사람인가. 나 자신 안으로 천착할 때에는 얻지 못한 물음의 대답들이, 관계 안에서 '덧입혀지는' 약함과 강함의 결들을 따라 지나와보니, 한꺼풀씩 벗겨져 있는 것이었다. 달려나감에 대한 갈망과 어쩔 수 없음이라는 실존 사이에 얽혀 살던 처지에서, 무언가 차갑고 둔탁한 것이 나로부터 스르르, 벗겨진 기분이다. 

치열함과 온유함이 함께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에 대한 단호함이 다른 이에 대한 잣대가 되지 않고,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때론 처연할 정도로 치달리고, 때론 온화하게 주변을 살필 줄 아는 지혜로움을 늘 갖추며 살고 싶다. 이 모든 것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를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늘 나라고 하는 동심원의 바깥으로 운동하는 Ex-istenz가 '되어져 가'고 싶다. 잘 안다. 소망함이 아니라, 실제적인 달리기를 통해서만 현실화되어지는 '이 세계의 것'임과 동시에, 믿고 소망하지 않으면 현실화시킬 수 없는 '저편으로부터 임재하는' 불가능한 가능성의 대상을 내가 추구하고 있음을. 

탈피. 지금의 나에게 그 단어는 Spiritualisierung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나는 영원자가 아니며, 정태적인 안식만을 누리기 위해 이 땅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의 영광과 광채 속에 머물길 간구했지만, 예수는 세상으로 내려가자고 하신다. 게으른 나는 시내산 위에 주님과 함께 머물고자 했으나, 하나님은 지긋이 산 밑으로 나를 인도하신다.

약해서는 남을 도울 수 없고

약해보지 않고서는 남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약함으로부터 걸어나오는 과정이 

나와 너의 시간을 꽉 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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