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12월 8일의 수기, 즐거운 현상학 연구 본문
지지난 주부터 폴 리쾨르 해석학 수업에 들어가고 있다. 프랑스 학자에게 리쾨르를 배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의미심장하다. 박사과정 세미나와 겹쳐서 엄두를 못 내다가, 세미나가 끝나는 날 바로 교수에게 메일을 보내고, 흔쾌히 환영하는 답장을 받고는, 매시간 리쾨르의 텍스트를 읽고 들어가고 있다. 내가 다니는 신학부는 해석학을 가르친다고 하면 구약학자/신약학자와 철학자/조직신학자가 협업하여 수업에서 가르치곤 한다. 그러다 수업 중 갑자기 둘만의 토론이 시작될 때면, 클로렐라 같은 학생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딴 짓을 하고, 철학자의 공세가 격해지면 이 신학자는 글쎄 유일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짓과 미소를 띄는 것이다. 내가 '해석'하기에는, '이봐 거기에 앉은 신학생 양반, 역시 우리 신학자들과 철학자들 입장은 많이 다른 것 같아'라고 하는 것 같아서, 나도 미소로 응수하곤 한다.
프랑스 교수는 수업이 끝난 후 나에게 '장, 당신도 발표 하나 하시는 게 어때요? 아직 발표자가 없는 주제가 꽤 남았'다고 했다. 내가 '어려울 것 같'다고 대답했음에도, 이 프랑스인은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았는지, 내 쪽으로 발표 시트를 스윽 미는 것이 아닌가. 나는 2월에 있을 가다머와 리쾨르의 대담 텍스트를 골랐다. 집에 와서 살짝 읽어보니 개관적인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많아서 최소한 <진리와 방법>과 <시간과 이야기>, 그리고 <해석의 갈등> 정도는 다시 한번 읽고 들어가야 할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즐겁다. 드디어 리쾨르와 가다머 아닌가. 리쾨르가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서 후설의 <이념들>을 완역한 일화를 듣고 나는 그가 얼마나 철학을 즐거워했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 즐거워함은 열정을 부르고 열정은 성실함을 부른다. 최근에 교수 신문에서 읽은 철학적 개념을 설명하는 글이 난문으로 가득한 것에 비해 섭취한 양분이 느껴지지 않아서 영 텁텁했는데, 반면에 브런치에서 한 강사가 해석학을 쉽게 정리해 놓은 글을 읽으니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리쾨르와 가다머의 해석학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해석학의 좋은 양분을 주고자 하는 열정이 커 보였다.
후설의 고생스러운 <시간의식> 정리작업을 하고, 문득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통찰 한 조각을 얻게 되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비문과 같은 화려한 구조가 아니라, 사람이 그 안에 살 법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 나의 글쓰기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향성 연구는 내가 영의 체험들을 하면서부터 '충만함에 대한 / 충만함으로부터의 (von) 의식'에 대한 천착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십년에 가까워지는 이 고민이 성공할지 실패할 지의 여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그 자체가 즐겁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게 자원은 충분히 주어졌다는 확신이 든다. 나는 지향성 연구를 성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가 즐겁고, 그 자체가 궁금하기 때문에 하는 중이다. 열정과 성실은 여기에 끌려 들어오는 것 뿐이다. 레비나스도 창의적으로 후설을 읽고, 리쾨르도 그러했다. 해석학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와 텍스트가 만나서 거기부터 시작되는 창조적인 발걸음과도 같은 것이다. 텍스트에게 고개만 조아려서는 좋은 읽기가 되지 못할 뿐더러, 좋은 글(과 행위)를 새롭게 창출해 낼 수도 없다.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즐거워진다. 잘 쓰고, 잘 그리고, 잘 부르면 깊은 속에 있는 나의 무언가가 재구조화되는 기분이 든다. 찬양을 하다가, 어느 순간 어떤 음조가 영을 더욱 개방하는 것을 돕는지에 대해 고민해보게 된다. 보다 구체적이고, 보다 직관적인 사고훈련을 많이 시도해보고 싶다. 흠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