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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폴 리쾨르에 대한 책갈피, 숙고적 인간

jo_nghyuk 2019. 11. 24. 21:35

"우리는 목적들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목적들을 달성하는 수단들에 대해 숙고한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III, 5. 1112 b12

의사는 자신이 낫게 해야 하는지 자문하지 않고, 연설자는 설득을 시켜야 하는지 자문하지 않으며, 정치가는 좋은 법칙들을 확립해야 하는지 자문하지 않는다. 각자는 하나의 목적을 설정하자마자, 어떻게 어떤 수단으로 그것을 실현할 것인지 검토한다. 폴 리쾨르, 타자로서 자기 자신, 234-235.

여기서 숙고는 프로네시스, 곧 실천적 지혜 (라틴학자들은 이 낱말을 prudentia로 번역했다)가 추구하는 길이며, 보다 정확히 말하면 프로네시스의 인간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기 위해 추구하는 길이다. 폴 리쾨르, 236

실천들은 사회적으로 그 구성적 규칙들이 확립된 협동적 활동들이다. 이런저런 실천의 차원에서 이 규칙들에 부합하는 훌륭함의 척도들은 고독한 실행자보다는 훨씬 더 먼 곳으로부터 온다. 폴 리쾨르, 242.

숙고적 인간은 불가능성의 땅에서 태어난다. 모든 것이 현 시점에서 가능하다면, 인간은 사유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유한다는 것은 불가능성에 그 발생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황금배카푸친 원숭이가 돌을 들어서 힘껏 열매의 단단한 껍질을 내리치는 것은 그가 열매의 껍질이라는 불가능성 앞에서 단계적인 사고를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철학자는 인간의 주저함이 철학함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말했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매번(je) 던져져 있는 상황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존재이다. 단계적 사고는 자신의 경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협동을 통해서 더 훌륭하게 기능한다. 내가 겪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도, 다른 (다수의) 이들이 단계별로 겪은 경험을 통해서 나는 그러한 미래를 선취하여 현재 안에서 새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숙고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숙고하지 않는 인간은 목표에 가닿는다 할지라도, 그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곳에 이르는 길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은채 내달렸기 때문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 제대로 가야, 느리게 가더라도 진짜 서울을 얻는다고 한 노목사가 설교한 바 있다. 내 눈 앞에 보이는 세계가 거꾸로 가기 때문에, 내가 제대로 가기 위해서는 그 세계에 대해 스스로가 거꾸로 가는 순례자가 되어야만 한다. 흐름에 휘말리지 않을 때에만 인간은 지금이라고 하는 순간을 얻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라고 말하였다. 지금이라고 하는 순간은 과거와 미래를 통합하는 처소이며, 과거로부터 떠밀려 가는 사람은 그러므로 결코 꿈꾸는 미래에 가닿을 수 없다. 흐름을 바꾸는 순간을 만나야만 하고, 끊임없이 매번jeweilig 만들어야만 한다. 의사는 자신이 낫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어떤 수단으로 그것을 실현할 것인지 검토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현실성을 계속 묻는 사람이 아니라, 믿는 바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를 검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진리에서 윤리로의 전이야말로 우리의 성육신이 아니던가?

숙고하는 것은 괴로운 삶이다. 그러나 인간은 쾌락만을 위해 지음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윤리적 책임이 있는 존재로 부르심 받았다. 짐을 질 줄 알아야 짐을 푸는 기쁨도 따라오는 법이다. 점점 두 발로 일어서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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