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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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방향지움

jo_nghyuk 2019. 11. 19. 00:08

자기를 스스로의 힘으로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힘의 부여도 필수적이지만, 스승의 방향제시가 명백한 현실성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믿어야 한다. 이해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 변곡점을 찍는 동력이 점진적 이해의 증강에서 나오는 것은 (완곡하게 표현하자면: 나오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믿어야 뛰어넘을 수 있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스스로를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스로'는 지금까지의 경험의 적분값이지, 그것을 넘어서는 확장적 힘을 담지하지 않는다. 후설은 <시간의식>(S. 447)에서, 시간 속에서 계속 변화하는 것(Ding)은 스스로 방향지움 (Ding in seiner Orientierung)이라는 표현을 다음 줄에서 곧바로 수정하였다. 그것 스스로가 자신의 변화를 방향지우지 않고, 그 자신은 스스로 나타남의 과정 가운데 있을 뿐이다. 그러나 누가 스스로 나타나게 하는가? 내가 내일의 나를 스스로 나타나게 하는가? 내가 스스로를 방향지우는가? 유대인인 후설의 이 표현은 나로 하여금 방향을 지우는 것이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존재하게 하시는 이라는 생각에 다다르게 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변화를 방향지우지 않는다. 피조된 존재들은 그 존재가 이미 방향지워져 있다. 

며칠간을, 아니 몇주간을 참으로 신물나게 앓았다. 스스로를 넘어서지 못하고, 내 안에 들어차는 타자성을 이겨내지 못해서, <넘어서지 못해서> 진화과정에서 도태된 유기체처럼 생명의 빛이 희미해져만 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가 본 데까지만 다른 사람을 이끌어줄 수 있다. leading한다는 것은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무거운 작업이다. 그러나 막상 나는, 더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나는 이 도시에서 그것을 넘어선 단 한 사람만을 알고 있으며, 그만이 나의 스승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내 육체적 감관과 정신적 지각이 느끼는 것을 그의 방향지움보다 더 신뢰하고 말았다. 누군가를 스승으로 삼기 위해서 멍청해질 필요는 없다. 다만 용기가 더 필요할 뿐이다. (지금까지의 이해의 지평을 버리고 과감히 새로운 지평으로 도약할 수 있겠는가?)

말하자면 스스로를 넘어서는 방향지움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웃으로부터의 요청이고, 다른 하나는 스승으로부터의 요청이다. (사실상 레비나스는 둘을 하나로 보아서, 가난한 이웃을 절대적인 스승과 동일시하였다) 겸손함과 온유함이 나에게 탑재되어 있었다면, 나는 스승으로서의 이웃과 이웃으로서의 스승이 나에게 방향지우는 것에 대해 레조넌스를 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은 불가능성으로 여겨졌었고,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동일성으로 그 변화가능성을 외재적인 곳으로 밀쳐 내었다. 오만한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해석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모든 것을 새롭게 이해해간다. (그래서 지혜자는 어리석은 이를 책망하지 말고 지혜로운 이를 책망하라고 말한다) 오만한 사람은 자기 반복의 삶에 갇혀서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겸손한 사람은 그 틀을 개방하여 하루하루를 쌓아간다. 

나는 여전히 불가능성과 씨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게 바뀌는 모멘텀은 스승의 책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예수는 위로만 하지 않았으며, 늘 불가능성에 대한 도전을 하며, 충성된 자를 책망하셨다. 내 앞을 달리는 사람을 보아야 나는 스스로를 넘어설 수 있다. 방향지움은 스스로 하는 것도 아니요, 저절로 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방향지움은 부르심인 동시에 그에 대한 현존재의 응답이다. 방향성은 인격 대 인격이 만나 이루는 합치통일Deckung의 통일성Einheit이다. 예수를 끌고가는 그리스도인은 존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을 데리고 가는 예수만이 존재할 뿐이다. 내가 자꾸 구부러졌다면, cor curvum in se의 허물을 벗지 못했다는 것이며 아직도 결단Entschlossenheit을 내리지 못하고 어영부영 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밝은 눈과 튼튼한 다리로 다시 질주해야만 한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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