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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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안개)

jo_nghyuk 2019. 11. 26. 03:35

계속 안개 낀 낮과 밤이 이어진다. 전혜린의 수필에 나올 법한 저녁의 거리를 걸어 집으로 온다. 오늘은 김 교수님의 발표가 있었다. 우간다에 고위급의 신분으로 간 그는, 한 우간다인의 말을 듣고 인생의 전환을 이루게 된다.

"당신은 진짜 우간다인의 삶이 어떤지 대체 알기나 하는가?"

그 다음날 그는 사표를 내었다. 그리고 빈민촌으로 향했다.  

오늘 그의 발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서 시작하여 그가 아프리카에서 경험한 신학의 여정을 아우르고 있었다. 나는 이 궤적이야말로 우아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성육신'에 대해 질문하였다. 그러면서 칼 바르트의 말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치 부엉이와 박쥐가 해에 대해서 이야기하듯이 하고 있지는 않은가?" - 을 해석학적으로 뒤집어서 제시하였다: "우리는 우리 신앙 바깥의 일을 마치 부엉이와 박쥐가 해에 대해 이야기하듯 하고 있지는 않은가?" 당대의 철학, 정치학, 생물학, 물리학, 미학 등을 비롯해 그야말로 모든 학문과 분과를 넘나들며 신학의 재구성 작업을 하였던 아우구스티누스가 오늘 다시 아프리카를, 그리고 우리들을 방문한다면 무슨 말을 할까?

세미나가 끝나고, 도서관에서 후설 연구를 이어나가던 나에게 문자 하나가 왔다. 김 교수님이었다.

독일의 박사과정이 끝나면, 목회를 할 것이냐는 그의 질문에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오히려 나는 그에게 질문했다: 내가 교회로 돌아간다면, 사회에 기여하는 교회를 만들 수 있을까? 심지어 지난 주에 나와 격론하였던, 나와 매우 다른 자리값을 가진 일본인 교수 조차도 나에게  화해에 기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늘 대답한다: 그저 기도하면서 나를 이끌어가시는 주님의 손에 놓여 있을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모든 전환점마다 그저 기도할 뿐이다. 

고국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과, 공장에서 압착되어 터져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 온다. 주변국과의 관계는 마치 화해할 수 없는 이웃과의 관계처럼 늘 감정적인 방향으로 치달리고 있다. 안개가 끼면 사물들이 섬과 같이 고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나라에는 대체 무슨 안개가 끼어 있는 것인가.

현대의 신학은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기쁨은 희망에서 온다. 희망은 열린 미래를 향하는 생명현상의 방향지움이다. 미래가 개방되지 않으면 생명의 빛은 꺼져만 간다. 현장으로부터 듣는 소리는 신음 소리, 한숨 소리, 비명 소리, 울음 소리로 가득하다. 미천한 출신인 나는, 그들의 아픔에 공감대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나로서는 기도하는 교회가 없이는 현장에 나갈 수 없으며, 끔찍한 현장을 마주할 용기가 없이는 신학하는/신앙하는 의미가 없어 보인다. 

교회와 사회 사이에 안개가 자욱하다. 나는 이것들 사이에 껴있는 불쌍한 실존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들 사이의 가교임을 확신한다. 하나님은 나를 관심도 없던 화해 연구의 현장으로 부르셨다. 그는 누구보다, 무엇보다 크시고, 누구도 나를 죽일 수 없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들/사람들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다. 

정직함만이 안개 낀 세상에 분별의 빛을 가져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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