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9월 28일 저녁설교, 누가복음 18:9-17 본문
9월 28일 화요일 저녁기도회
찬송 471 통 528
- 주여 나의 병든 몸을
말씀 누가복음 18:9-17
-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15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오늘 자신을 의롭다고 믿으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비유에는 바리새인이 등장합니다. 오늘 이 말씀은 바리새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갑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였다"고 11절은 말합니다. 이 말은 바리새인의 분리주의적 영성을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바리새인은 벌써부터 자신은 세리와 다르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기도를 합니다. 나는 이들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11절-12절에서 그 사람의 기도를 보십시오. "저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토색, 즉 탈취를 하지도 않았고, 불의한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간음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기 서 있는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는 이레, 즉 7일에 두 번씩 꼭 금식합니다. 또 소득에서 십일조는 꼭 드립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바리새인은 신앙생활을 참 잘하는 것 같습니다. 금식기도도 하고 십일조도 드리고, 사회 속에서 나쁜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이미 그가 사용하는 문법에서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11절 "나는 누구와 같지 않습니다."
12절 "나는 금식합니다. 나는 십일조를 드립니다"
이 사람의 기도의 인칭이 전부 1인칭으로 되어 있습니다. 누가가 이러한 기술로 인해서 암시하고자 했던 바는, 바리새인의 신앙생활은 하나님 중심적 신앙생활이 아니고, 철저히 자기 중심적 1인칭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이웃을 향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의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는지 다시 9절에서의 예수님 말씀을 보십시오: 자기를 의롭다고 믿으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읽으며 아 이건 바리새인이지, 바리새주의적 영성이지 라고 단정짓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것을 바리새인들만 들으라고 예수님이 비유를 드신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비유로 들어 자기 의로 가득차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위험으로 차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조금만 잘하면 영적으로든 육적으로든 교만해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의롭다고 해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이 나름 잘 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것입니다. 이 "스스로 믿는 것"의 결과물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높이는 것과 다른 사람을 낮추는 것은 언제나 함께 갑니다. 자존감이 좋은 것은 자신을 높이고 드러내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나를 높이는 것은 언제나 상대적 비교의 결과입니다. 저도 늘 집에 와서 반성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이야기하다가 은연중에 나를 높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말을 하는 때가 있습니다. 아, 내가 바리새인이구나. 조금만 잘 해도 나를 높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높이는 순간 그것은 상대적으로 누군가를 낮추는 행위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무익한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 Stolz가 없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습니다"하고 고백해야만 이 영적인 교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대놓고 세리를 멸시하지 않았습니다. 다 자기 신앙이 얼마나 훌륭한지에 대한 이야기 뿐이었습니다. "나는... 나는..." 세리는 딱 한 문장입니다. "나는 저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세리를 자기 자신과 비교해서 이야기합니다. 바리새인은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세리를 불쌍히 여기라고 명령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래디컬하게 말씀하십니다. "너 자신이 얼마나 불쌍하고 비참한 존재인지 그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세리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잘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세리의 기도의 1인칭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이 주체이고 나는 주의 긍휼을 기다리는 객체입니다. 자신이 삶의 주인의 자리에 앉지도 못할 자격없는 자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이르되..." 세리는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합니다. 성전 깊은 곳에 가까이 가지도 못합니다. 자신이 철저히 죄인이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너무나도 깊게 자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가슴을 치고 있는 것은 그가 통회하고 자복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누가 의롭다고 하십니까? 세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리가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의로운 것은 사람 눈으로는 바리새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받은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이 그렇게 잘하고도 다 까먹은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에는 하나님도 없고 이웃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으로만 가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은 나 자신을 떠나서 상대에게 가는 것인데, 바리새인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멸시합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며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라"고 잠언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로 가득한 의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차라리 나의 뼈까지 스며든 죄를 애통하고 주께 부르짖는, "하나님"을 주체로 간절히 바라는 텅 빈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 이후에 이어지는 어린아이들의 에피소드는 예수님의 이 비유에 대한 보충설명입니다.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이 뭘 이해하겠느냐 하고 예수님께 오는 것을 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의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장성한 자의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의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아니라 회개한 세리와 창녀가 가장 먼저 천국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아니하는 자는 결단코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는 자기 힘으로 살 수 없습니다. 자기도 그것을 잘 알아서 부모를 늘 찾습니다.
정서적 지지, 영양적 지지, 교육적 지지 모두 필요합니다.
우리도 우리 힘으로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며, 우리는 가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붙어살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고 말라 비틀어질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할 때, 나에게 의로운 것 하나 없고 선한 것 하나 없다는 것 인정할 때,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주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기 시작할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처럼 기도합시다. 그러나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기도하던 바리새인처럼 "나는 저 바리새인과 같지 않습니다"하고 기도한다면 우리는 똑같이 자기 의에 빠진 죄인이 될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바리새인처럼 교만하며, 세리처럼 음란하고 탐욕스럽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십니다. 주님만을 의지하며 이 시간 함께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