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창조주가 시전한 블리자드 본문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창조주가 시전한 블리자드

jo_nghyuk 2022. 2. 3. 06:58

기차에서 내내 숨이 차올랐다. 숨이 차오른다는 것은 가속이 붙은 바쁜 호흡에 몸이 동기화를 잘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숨이 많은데 숨이 부족하다. 이상하다. 

이전의 집은 미니멀리즘의 공간 여백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사는 집에는 짐이 많다. 쌓여있는 물건들은 서로서로 덕지덕지 달라붙어 경계가 없는 하나의 집합명사인 짐이 되어버린다. 물건이 많아질수록 공간이 줄어든다. 잘 쓰는 물건은 공간을 창출하고 구성한다. 쓰지 않는 물건은 공간을 빨아들이고 혼탁하게 만든다. 

지인이 기차 역에 마중을 나와주었다. 트램을 타고 기숙사에 가려는데 반대방향으로 타버렸다. 더 좋았다. 어디를 향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길을 잃어버리고 싶어서 나는 이 먼 도시까지 온 것이다. 한식당에는 중국인과 독일인으로 가득했다. 무알콜 맥주를 마시고 나와 산으로 둘러싸인 시간이 멈춘 듯한 도시의 골목 골목을 거닐었다. 오래된 도시의 지붕 위로는 가슴처럼 산이 봉긋 솟아 있었다. 저 풍경이 나에게 아늑함과 안도감을 주었다. 나는 숲의 숨에 둘러싸여 있다. 

다음날 아침, 샤워를 했다. 100유로 대의 기숙사의 공용 사워실은 마치 격오지에서 근무했던 낙후된 군 초소의 시설을 떠올리게 했다. 샤워기 헤드에서는 물줄기가 샹젤리제의 방사형으로 뻗은 거리만큼이나 복잡다단한 각도로 퍼져나왔다. 샤워부스 바닥의 실리콘이 닳아 해졌는지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그런데 그것조차 즐거웠다. 이렇게 형편없는 환경에서 묵을 수 있다니, 하루 만 원짜리 숙소에 묵으며 구소련의 풍취를 만끽하던 유튜버의 삶과 같지 않은가. 나도 그 유튜버처럼 식사만큼은 왕처럼 했다. 

나는 애초에 고즈넉한 여행을 꿈꿨다. 대학 열람실에서 현상학 자료를 뒤져보고, 머리카락이 순하게 가라앉을 때까지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고 집에 돌아오려 했다. 그러나 우리는 사물함에 무거운 가방을 쳐박아넣고 산 정상으로 향했다. 산악 케이블 열차를 타고 오른 후 정상에 있는 가판대에서 뜨거운 커피를 사서 눈보라 속에서 맛없는 커피를 마셨다. 가루를 타서 만든듯한 거지같은 커피는 상대성 이론을 따라 혹독한 환경 속에서 게이샤 커피보다 큰 만족감을 선사해주었다. 내려가는 케이블 열차가 한참 뒤에 있어서 산 정상에 있는 호텔의 레스토랑에 무작정 들어가 식사를 했다. 스테이크를 썰고, 또 무알콜 필츠 비어를 마셨다. 이 도시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생각해보지도 못한 그림이었다. 다가온 미래는 예상한 미래가 아니다. 마치 코로나로 허비한/보낸 2년과도 같이. 그리고 그렇게 불현듯 덮친 미래는 나를 송두리째 바꾸어놓는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유학하는 벗 덕분에 드디어 신학부 도서관에 들어가 자료를 열람할 기회를 얻었다. 이런 저런 자료를 찾아본 뒤에, 나에게 남은 3분의 시간을 강가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허비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ICE에 몸을 실었다. 작은 얼음조각을 기대했었는데, 블리자드를 얻어맞고 돌아가는 기분이 여간 쏠쏠한 것이 아니었다. 창조주 맙소사, 감사합니다. Du bist nicht genug für mich, viel mehr als genug.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