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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에는 자작나무 숲이 있습니까

jo_nghyuk 2024. 7. 10. 10:20

바이마르의 지인이 늘 함께 마시던 카페에서 원두를 선물로 사왔다. 새벽기도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커피를 내렸다. 늘 함께 마시던 원두 중 하나인 과테말라였다. 책을 읽다가 잠시 잔에 손을 뻗어 커피를 마셨다. 그 순간 그 친구도, 바이마르 도서관도, 집 앞 아이스펠트 광장도, 헤르더 교회도, 괴테가 설계한 공원도 그 잔에서 시작됨을 느꼈다. 마들렌에서 시작되는 기억의 빅뱅처럼, 어딘가에 움추리고 숨어있던 기억들이 커피 향의 감각과 함께 일제히 기지개를 켰다. 아담 자프란스키는 하이데거의 세계화란 이와 같다고 묘사했다. 하이데거가 강의하던 교탁은 갈색의 딱딱하고 직선적인 어떤 물체가 아니다. 그 교탁은 쓰임새가 있는 교탁이며, 사람이 뒤에 서서 강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탁이다. 내가 마신 커피는 과테말라에서 생산되고, 바이마르에서 로스팅하고, 친구가 탄 비행기에 실려와서, 서울에 있는 내 집에서 다이소에서 산 일회용 드립백을 통해 내려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서 내 기억의 빅뱅을 일으킨 사랑 그 자체이다. 

누군가가 말했는데, 아름다움이란 단순히 멋지고 매력적인 것이 아니라 더 크고 단단하게 통합되어 가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새로 드러나는 충만이며, 우아함과 기품에 대한 더 위대한 감각이고, 펼쳐지는 생의 풍요로운 기억으로 돌아가는 귀향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아름다움이란 미래적인 동시에 근원적인 현재이며 기원적인 무언가를 또한 함축하고 있는듯 하다.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이 겹쳐지면서 기존의 것이 재형상화를 이루어간다. 새로운 것은 오래된 것에 덧대고, 오래된 것은 새로운 것에 덧입혀서 무언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직조해나가고자 한다. 더 위대한 감각은 새로울 뿐 아니라 기원을 향한 귀향이기도 하다. 영원성은 이처럼 시간 속에서 폭발하며 현재를 충일하게 한다.

삿포로에 가고자 한다. 기도 중에 홋카이도의 교회가 떠올랐다. 그리고 도쿄의 형제 자매들이 떠올랐다. 독일에 가고 난 뒤부터 습성처럼 자꾸 북쪽으로 올라갔다. 함부르크, 덴마크, 암스테르담, 스웨덴, 헬싱키... 가끔 핀란드의 자작나무 숲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 검고 빽빽하게 들어선 자작나무 숲 속으로 숨고 싶고 사라져 버리고 싶다. 버섯처럼 자작나무 옆에 평온하게 붙어서 내리는 비에 몸을 씻고 싶다. 지칠 때면 늘 교토를 찾아 외로움의 겨드랑이를 씻고자 했다. 그때마다 교토는 나의 고독함을 더 지독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지칠 때, 외로워질 때, 가족이 생각이 난다. 어머니가 생각나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 동생이 걱정되고, 함께 했던 동경의 형제자매들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나는 숨고자 할 때 누군가의 겨드랑이를 찾아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고, 깊고 검은 바다를 보는 것을 즐기워 하고, 선풍기를 틀고 책을 보면서 누군가의 생각의 심연으로 들어가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들숨날숨이 한없이 얕아질 때, 비로소 가장 깊은 근원 속으로 자맥질을 할 때인지도 모른다. 지치고 나서야 이 오래되고 낡은 블로그에 돌아와 다시 글을 쓴다. 심해 속 괴물처럼 깊게 가라앉고 싶다. 삿포로에는 자작나무 숲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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