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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꼴라쥬
이전에는 모임 속에서 늘 무언가 웃겨야 한다는 강박 아닌 충동이 있었나보다. 십년도 더 전의 이야기이다. 하루는 지인이 나에게 '웃긴 이야기를 꼭 하려 할 필요 없다'라고 조언해주었다. 재밌는 것은 더이상 사람들을 웃기는 것을 못하게 되자,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모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모임은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 지속되었었는데, 당시의 나에게는 그 한달이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지인이 참 고맙다. 있는 모습 그대로 놔두었더라면, 내가 유머와 거룩함의 균형을 깨닫게 되었을까? 나에게는 그 한달이 참으로 고통스러웠지만, 그 기간은 나에게 필요한 기간이었다. 그 이후로, 언제 입을 열어야 하고, 언제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이 조금씩 생긴듯 하다. 반대로, 어떤 ..
대학 시절, 락밴드 콘서트장에 간 일이 있다. 좀 느긋하게 가서 긴 줄의 뒤쪽에 서야 했다. 몇 시간 기다린 후 콘서트장에 입장하면서 드디어 넓은 콘서트홀이 나오자, 일순간 입장하던 긴 줄의 직선이 일그러지고 마침내 무너지면서 백미터 경주처럼 스탠딩 앞자리를 향해 모두들 진격했던 일이 있다. 이번 경복궁 야간개장은 그 콘서트장을 떠오르게 했다. 왕이 다니는 가운데 길을 줄로 해서 길고 넓은 줄이 근정전으로 가는 입구에서 바깥 입구까지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 줄을 서지 않고 곧장 앞으로 가는 사람들이 줄은 선 사람 수만큼이나 많았다. 재밌는(?) 것은 줄을 서지 않은 사람들은 다소 수월하게 입장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큰 줄에 서 있었는데 한시간 여를 기다린 후에야 입장할 수 있었다. 사실 예매권을 가..
내가 어떤 선함을 행하고 난 뒤에 전에라면 외롭다고 난리를 피웠을 것이다. 왜냐면 내 의지로 내 자아를 죽이려 했으니까. 모든 사람은 위로를 필요로 하고 용납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나도 그러하다. 그러나 입만 벌리고 있어서는 누군가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 결국 내 쪽에서 찾아가고 위로하고 안아줘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쯤에서 자아의 질문이 시작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의지로 이 선하고 의로운 일을 행했다면: 나는 누가 위로할 것인가? 그렇다면 누가 나를 위로할 것인가? 내가 사람들의 연약을 품을 때, 나는 강해야 하는 것인가? 나의 이 연약은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굴 속으로 들어가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여, 사랑하는 나여, 자신의 의지로 자아를 죽이며 이러한 일을 ..
그러니까 성화는 결국 성도를 자유 가운데로 이끈다. 이 성화의 여정 중에 혹시 자기 성화나 자기 경건에서 오는 긴장의식을 느끼고 있다면 오히려 내려놓는 것이 좋다. 긴장하고 있다면 그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며 아직 성령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상이나 벌 때문에 성화"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중 은혜의 하나로써 한없는 사랑 가운데서 견인되어지고 성화"되어지는" 것이다. 내가 피동적인 것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구원이나 거룩에 대해 전적으로 무력한 출발선상에 있었으며, 하나님에 대하여 접붙여져야 시작할 수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창조되어진 순간부터 피동적이며, 구원에 있어서도 그러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잠잠히 서 있어야 한다. 그러..
유대인에게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신다. 그러나 이방인인 나에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성령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영, 양자의 영을 주심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 이 아람어인 아빠,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방인 조차도 그리스도의 품 깊숙한 안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품 안으로 성령으로 인해 우리가 안겨질 수 있다는 선언이 되어준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 아들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이제 양자는 개인적인 감격에서 머무르지 않고, 더 큰 공동체적인, 너와 그를 모두 초청하는 우리로서 껴안으며 함께 "아버지"를 부르는 더 튼 가족이 된다...
바울은 그의 공동체를 "주 안에서 얻은 형제"라고 부른다. 빌 1:1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형제는 다른 사람에게 형제가 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내게 행하셨던 것만이 나를 다른 사람의 형제로 만들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형제가 될 수 있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서 그에게 해주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공동체 속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형제는 형제애를 갈망하며 내게 마주 서 있는 진실하고 경건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고 죄에서 풀려나 믿음과 영생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을 그 자체로서 규정하는 것, 즉 그의 깊은 내면성과 경건송이 우리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아니라, 그를 그리스도로부터 보는 것만이 우리의 형제 관계를 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