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성령과 상황윤리 본문
자세히 보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고 한다. 정태적인 율법이 아니라 어느 의미에서는 상황윤리가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윤리라는 것이 말 그대로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지 않고 타락한 인간의 자율성autonomy에 핸들이 맡겨지게 될 때나 신율theonomy을 가장한, 또는 타율hetronomy를 가장한 위선적인 자기방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인간은 뼈 속까지 답이 없다. 물과 피와 성령의 증언으로 그를 바닥에서 건져올릴 때 조차, 인간에게는 힘이 없다. 그럼 그를 구해주고 난 뒤에 그에게 스스로를 죄와 악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여전히 인간은 무력함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중간계에 속하나 여전히 "아래로 끌여당겨지는" 숙명의 실존을 부둥켜안고 슬퍼하는 죄된 존재인 것이다. (또는 그렇게 된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될 때, 우리는 정태적인 율법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때는 상황윤리적인 요소가 허용된다. 이때부터 우리의 자유는 오직 "성령 안에서의" 거룩한 자유가 되고,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가 된다. (그러나 여전히 선한데는 지혜롭고 악한 데는 미련한 어린아이가 되도록 힘써야 함은 분명하다.) 다윗이 안식일에 진설병을 먹은 것이나, 안식일에 예수께서 병자를 고친 것이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을 비벼 먹은 것이나 이제는 더 높은 질서의 법칙 아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 생각해보자. 소위 상황윤리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때'에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일해야 하는 것인가? 나는 이것을 계속 고민해왔다. 몰트만이 지적하듯 하나님의 임재가 성례전적으로 단지 예배 시간에만 고정되고 틸리히가 지적하듯 우리가 어느덧 '공간적인' 신에만 집착하듯 예배당 안의 거룩함에만 천착하며, 중심화를 꾀하며, 역사의 하나님, 과거로부터 현재를 통해 열린 미래로 우리를 '인도하는' , 그리고 히브리서 13장이 권면하듯 "영문 밖으로" (Out of camp, barrack) 나가는 새로운 형태의 제사-치욕을 짊어지고 영광에서 소외로 스스로를 내던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타인을 위한 희생적 제사-'를 우리는 실천하지 못했음은 사실이다. 성례전적 예배가 끝나면,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이는 '광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광야로 나갔던 모든 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광야로 가야 한다.
논거를 대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예시를 들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감는 새 1권을 보면, 흐름이 있을 때, 움직이고, 흐름이 없으면, 멈추는 것이 질서이다. 질서를 어기고 움직이면 이 전장에서 죽는 것이다. 때로는 움직이지 않는 죽음을 지나야 살 길이 열리는 것이다.
상황윤리 자체를 나는 비판하지 않는다. 이는 오히려 시대정신에 궤를 같이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에 또한 맹점이 있음을 간과하지 말자. 너는 스스로를 기만하기 쉽다. 너는 너 자신보다 율법 자체를 내던지기 쉽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의 그 "흐름"이 없을 때,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초극'을 향한 광기어린 발걸음이 아니라, "규범"이라는 것이다. "율법은 적법하게 쓰면 선한 것이다.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쓰인 것이 아니라 불법한 자를 위하여 쓰여진 것이다" 너를 붙드는 것은 성경의 교훈이다. 너를 수정하고 교정하고 바로잡는 것은 살아있는 말씀이다.
"그리고 성령은 이 성경과 떨어져서 활동하지 않는다." (칼빈)
그렇다면, 침묵과도 같은 순간이 다가올때, 사실 너는 더욱 치열하게 기도하고, 영적 분별을 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인도가 없이 상황윤리만을 밀고 나가는 사람은 산 위로 돌을 영원히 굴려올리는 시지푸스일 뿐이다. 상황윤리를 곧이 곧대로 받을 것이 아니라, 성령의 말하심과 성경을 통해 정교하게 조명해야 할 것이다.
성령이 없는 자율성이란 생각할 수 없다. 애통이 없는 회개가 회개가 아니듯이, 눈물이 없이는 신학도, 설교도, 삶도 없다.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될 때, 우리는 정태적인 율법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때는 상황윤리적인 요소가 허용된다. 이때부터 우리의 자유는 오직 "성령 안에서의" 거룩한 자유가 되고,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가 된다. (그러나 여전히 선한데는 지혜롭고 악한 데는 미련한 어린아이가 되도록 힘써야 함은 분명하다.) 다윗이 안식일에 진설병을 먹은 것이나, 안식일에 예수께서 병자를 고친 것이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을 비벼 먹은 것이나 이제는 더 높은 질서의 법칙 아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 생각해보자. 소위 상황윤리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때'에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일해야 하는 것인가? 나는 이것을 계속 고민해왔다. 몰트만이 지적하듯 하나님의 임재가 성례전적으로 단지 예배 시간에만 고정되고 틸리히가 지적하듯 우리가 어느덧 '공간적인' 신에만 집착하듯 예배당 안의 거룩함에만 천착하며, 중심화를 꾀하며, 역사의 하나님, 과거로부터 현재를 통해 열린 미래로 우리를 '인도하는' , 그리고 히브리서 13장이 권면하듯 "영문 밖으로" (Out of camp, barrack) 나가는 새로운 형태의 제사-치욕을 짊어지고 영광에서 소외로 스스로를 내던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타인을 위한 희생적 제사-'를 우리는 실천하지 못했음은 사실이다. 성례전적 예배가 끝나면,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이는 '광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광야로 나갔던 모든 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광야로 가야 한다.
논거를 대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예시를 들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감는 새 1권을 보면, 흐름이 있을 때, 움직이고, 흐름이 없으면, 멈추는 것이 질서이다. 질서를 어기고 움직이면 이 전장에서 죽는 것이다. 때로는 움직이지 않는 죽음을 지나야 살 길이 열리는 것이다.
상황윤리 자체를 나는 비판하지 않는다. 이는 오히려 시대정신에 궤를 같이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에 또한 맹점이 있음을 간과하지 말자. 너는 스스로를 기만하기 쉽다. 너는 너 자신보다 율법 자체를 내던지기 쉽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의 그 "흐름"이 없을 때,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초극'을 향한 광기어린 발걸음이 아니라, "규범"이라는 것이다. "율법은 적법하게 쓰면 선한 것이다.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쓰인 것이 아니라 불법한 자를 위하여 쓰여진 것이다" 너를 붙드는 것은 성경의 교훈이다. 너를 수정하고 교정하고 바로잡는 것은 살아있는 말씀이다.
"그리고 성령은 이 성경과 떨어져서 활동하지 않는다." (칼빈)
그렇다면, 침묵과도 같은 순간이 다가올때, 사실 너는 더욱 치열하게 기도하고, 영적 분별을 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인도가 없이 상황윤리만을 밀고 나가는 사람은 산 위로 돌을 영원히 굴려올리는 시지푸스일 뿐이다. 상황윤리를 곧이 곧대로 받을 것이 아니라, 성령의 말하심과 성경을 통해 정교하게 조명해야 할 것이다.
성령이 없는 자율성이란 생각할 수 없다. 애통이 없는 회개가 회개가 아니듯이, 눈물이 없이는 신학도, 설교도, 삶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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