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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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8월 19일의 수기, this is the gloaming

jo_nghyuk 2019. 8. 19. 19:57

휘브리스로 가득한 글쓰기를 뉘우치고자 40일간은 이 공간에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매끈한 글 뒤에 교만함이 숨어 있다. 그 공교한 메커니즘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한 글은 그대로 남겨 둔다.  

스스로에게 잘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 나에게 있어 그 옷의 이름은 포괄성이다. 나는 북쪽으로 향하는 지향성이 강한 사람이다. 암스테르담에 머물 때도 Noord로 가능한 한 페달을 밟으며 올라가고자 했다. 기차를 탈 수 있다면 꼭 북해를 보러 나아갔고, 프랑스에서도 노르망디에 다다르는 것이 그저 좋았다. 사실 북해 자체는 그다지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일상의 기후는 흐리며, 자갈에 차가운 물들이 부딪히는 곳이다. 

나는 흐릿하고 복잡한 것이 분명한 패턴을 이루는 순간에 늘 매혹되어 버린다. 내가 북유럽을 가본 적도 없이 갈망하는 이유는, 단촐하지만 경과의 양상을 파악할 수 없는 재즈 트리오에 대한 기호 그리고 실용적이지만 늘 단순성의 미학을 골격으로 삼고 있어야 하는 디자인에 대한 철학과 나 자신이 어떤 지점에서 화성을 이루기 때문이다. 교토의 북으로 진입하면서 삼나무 숲이 고요하게 패턴을 이루는 공간감이나, 바위 정원에서 현상학적 시공에 빠져드는 명상감도 늘 좋다. 

나에게 있어서 신은 실수와 실패의 포괄자이다. 모태에서 유년시절을 지나 늘 불안을 학습해온 나로선 넉넉함, 이라고 하는 공간감이 늘 낯선 나라의 지평 같이 느껴졌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모든 것을 넘어서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부모의 교육을 넘어서고, 모든 무서웠던 것들을 죄다 넘어서는 기분. 나를 둘러싸고 나와 함께 직조되어져 가는 세계 전체를 넘어서고, 마침내 나 자신까지도 넘어서지만, 나는 나로 머물러 있고, 하나님은 무한한 포괄자로서 여전히 나를 껴안고 있는 중이다.  

내가 경험하고 지각하는 모든 것은 내 존재방식에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러한 것을 어떻게 지각할 것인가, 의 문제는 가장 중요한 수행적 질문일 것이다. 후설은 내가 지각하는 것들에 대해 그것을 지각하는 내가 능동적으로 자유변경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내가 느끼는 것을 소음으로 여길 수도 있고, 소리로 여길 수도 있다. 나는 너를 적으로 규정할 수도 있고, 친구로 규정할 수도 있다. 나는 내가 경험하는 실수와 실패들을 씻을 수 없는 오점과 상처로 남길 수도 있고, 포괄과 허용이 가능한 하나의 경험으로 남길 수도 있다. 늘 그러한 것들의 수행자agent는 인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그저 선물로 받는다. 그 넉넉함, 이 나로 하여금 실수하게 하고, 실패하게 하고, 다시 일어서게 한다. 애쓰지 않게 하고, 그러나 달려갈 수 있게 돕고, 다급하지 않게 하고, 그러나 바르게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나를 통제하는 대신에 자유하게 하고, 감각들과 지각들을 억누르는 대신 일깨우며 방향성을 준다. 

사람은 세계로부터 숨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포괄함으로써 세계를 넘어선다. 

그렇지 않다. 세계를 넘어서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다. 나귀는 자신이 여리고 성에 입성하는 주역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결국 이 날의 나는 스스로가 들나귀와 같이 멍청하고 교만하다는 것을 드러낸 것 뿐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자신의 위치를 혼동하는 순간, 어스름이 그의 세계에 깔린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회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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