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10월 15일 저녁설교, 누가복음 20:45-21:6 본문
10월 15일 금요일 저녁기도회
찬송 176장 통 163
- 주 어느 때 다시 오실는지
말씀 누가복음 20:45-21:6
-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
누가복음 20장
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1장
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현실주의자들인 사두개인들 이야기 이후에는 이 땅에서 높임받기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긴 옷을 입고 다니며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좋아한다고 표현합니다. 긴 옷은 거룩한 예복 또는 존귀한 자의 옷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내면의 영성보다는 겉으로 보여지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내면을 귀한 하나님의 영생으로 채우기보다는 지나가 없어져버릴 세상의 명성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사람들이 다 보는 장소에서 기도를 길게 하였다.
그들이 좋아하는 자리는 잔치자리이고 윗자리에 올라가는 것이다.
그들은 긴 옷을 입고 시장에서 문안받고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들은 가난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다.
저는 이 서기관에 대한 구절을 읽으면 거마비 명목으로 많은 돈을 받는 한국교회의 나쁜 전통을 떠올립니다. 지금은 많이 없어져서 실행하지 않는 노회도 많습니다.
거마비는 교통비라는 의미의 조선시대의 표현입니다. 목사 안수를 받는 이가 안수를 주고 준비하는 목사들에게 드리는 사례비 같은 것인데 이것이 100만원 정도 합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이런 폐단이 싫어서 노회에 아예 출석을 안하십니다. 사람들이 보는 장소에서 문안받기를 좋아하고, 윗자리를 좋아하고, 긴 옷을 입고 인정받기 원하고, 가난한 자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큰 액수는 아니지만 약간의 지원을 받는 데가 있는데, 모교회에서 200달러를 매달 지원받고, 이전에 어떤 목사님에게 20만원을 지원받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남편께서 암으로 돌아가시고 두 자녀를 혼자 키우시는 분입니다. 저는 학교에서 장학금을 지원받기 시작하면서 그 목사님에게 그만 주시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이기 때문에 꼭 보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저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이 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재정에 대해 훈련시키시는 과정일 것입니다. 저는 저의 삶에서 재정을 정직하게 사용하지 않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엄중하게 다루시는 것들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그 재정을 다루어야 합니다. 그 돈이야말로 가난한 과부가 가진 돈을 다 넣어 헌금한 두 렙돈과 같은 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이야기는 우리를 안심시키는 이야기가 아니요, 우리를 뒤흔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서기관의 위선을 너도 행하지 않게 조심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말씀하시지요. 이 누룩이 너의 영혼에도 퍼져서 너의 영혼을 더럽히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과부의 헌금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부자의 헌금에, 아름다운 성전과 화려한 장식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정작 그 안에 들어 있어야 할 공의와 사랑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경외하는 참된 마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성전이 무너뜨려져야 한다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외식이, 우리의 허물이, 우리의 탐욕과 음란함이 다 무너져야 합니다. 몇 가지를 고쳐서 성전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이 회복되기 위해 성전은 먼저 무너져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성전은 회복되지 않습니다. 그 능력이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의미입니다. 우리의 의지가 아예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뜻만이 사셔야 하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삶의 의미는, 나의 의지가 죽고 하나님의 의지로만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져야 한다는 6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비우고 또 비워서, 주님만이 가득하시게 해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온전한 성전을 세워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외양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진실한 것이 없다면 외양적으로 아주 좋은 것을 드려도, 우리의 삶에 위선적으로 계속되는 죄악에 대해 예수님은 집중하실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정말 드릴 것이 없는 중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께 헌신할 때에,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성전으로 보실 것입니다. "잘하였다. 네가 적은 능력으로도 충성하였구나"하고 예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셨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 잘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 적어도 거기에서 충성할 때 예수님은 그것을 아주 잘 하였다고 칭찬하십니다.
성전은 우리의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거하셔야 하는 성전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은 교만하고 음란한 고린도 성도들에게 경고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환경일까요? 고린도후서의 다음 구절은 더 충격적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예수님께서는 오늘 누가복음에서도 성전이 무너뜨려질 것을 명하십니다. 성전 안의 것이 지저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주의 성전이라는 것은,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으로 주님을 높이고 있을까요? 나 자신을 높이고 있을까요?
이 부요함이 하나님의 성전을 거룩하게 하지 않고, 더럽힐 때, 예수님은 오늘 말씀처럼 다시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도록 무너뜨릴 것이다"
성전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성전의 장식이 아니라 성전 안에 있어야 할 것을 찾으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 눈이 보는 것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눈이 향하고 마음이 향하는 곳에 따라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은 지금 밝게 타오르고 있거나, 어두침침하거나 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우리의 눈이 늘 주님을 향하고, 우리의 몸이 늘 거룩하고 깨끗한 성전으로 주가 받으시기에 합당한 성전이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