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10월 10일 주일예배 설교, 히브리서 10:19-25 본문
10월 10일 주일예배 설교
"믿음, 소망, 사랑"
히브리서 10:19-25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는 백성의 죄를 속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히브리서 2장을 보면,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났는데, 그 근원을 모든 사람을 위해 고난을 겪으시고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다고 성경 기자는 말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할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풀어주신 그 예수님은, 우리가 시험 가운데에 있을 때에 우리의 시험받는 그 연약함을 부끄러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연약한 우리 옆에서 우리와 친히 함께 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가 순종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돕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브레멘 기도원에 가서 김화경 선교사님에게 기도할 때마다 저는 하나님께 매번 같은 음성을 듣습니다. 좀 부끄러운데, "너 많이 힘들구나. 네 짐이 무겁구나. 그래, 내가 도와줄게" 하고 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처음 들을 때는 아, 참 감사하다 하고 생각했는데, 그걸 다음 해에 또 듣고 나니 약간 당황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힘내라! 일어나라!" 또는 "정신 차려라!"하고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매번 제가 기도를 받을 때마다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너 많이 힘들지. 네 짐이 많이 무겁구나. 그래, 이제 나와 함께 하자. 내가 너의 짐을 지어주마. 내가 도와줄게. 같이 해보자" 예수님은 나의 연약함 한 가운데에 오셔서 나를 부끄러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짐을 지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같이 앞으로 나아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새롭고 산 길을 열어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지요. 아, 살 길이 열렸구나. 그때 우리의 마음에는 홀가분함이 있습니다. 자유함이 있고, 안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아, 그 전에는 율법의 짐을 지고 아무리 노력해도 내 힘으로 갈 수가 없고 그저 내 죄짐에 눌려 부담만 가득하고 억눌림만 가득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내 짐을 덜어주시고, 아니, 내 죄짐을 대신 지시고 자신의 가벼운 짐만 나에게 주시는구나. 아, 살았다!
(마태복음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을 가벼움이라
우리에게 가벼운 짐만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쉬운 멍에를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셔서 거창하고 무거운 것을 추진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시는 분이시고, 가난한 동네의 마굿간에서 태어나시고, 귀신 들린 자와 저는 자, 나병 환자를 만져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진실된 것을 행하시고, 우리 눈이 보기에 화려한 것을 추구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시편 131편에서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겸손한 마음은 큰 일이나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않는 마음입니다. 겸손한 마음은 오직 아이가 어머니 품에 있듯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네 짐이 무겁구나"하시는 주의 음성은,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나에게 돌아오라. 먼저 나와 함께 거하자"는 주의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우리는 초대장만 받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집에 들어갈 수 있게 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용기를 줍니다. 아, 나 같은 자도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가 있구나. 나 같은 자도 초대를 받았고, 예수님이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나를 당신의 형제요 자매라고 부르시는구나.
나 자신을 바라보면 담력이 떨어집니다. 낙심이 될 뿐입니다. 나에겐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노력한다고 나에게서 선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히브리서 12장에서 낙심하지 말고 "믿음의 창시자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합니다. 믿음은 내가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내 안에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살 길이 열렸습니다. 참으로 주의 크신 사랑입니다. 자신의 육체의 죽음을 통해 이 살 길이 열렸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의 육체를 성소를 가리는 휘장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처소인 성소는 죄인이 들어갈 수 없어서 휘장으로 가리어놓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이 휘장을 찢으시고 우리 모두를 성소로 초대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의 육체가 찢김을 당할 때, 우리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가는 살 길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희생입니다. 예수님의 이 희생의 사랑 때문에, 나를 위해 대신 겪으신 이 고난 때문에 우리의 가리워진 눈도 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열린 눈은 이제 낙심이나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미래를 향합니다.
"나 여호와가 네게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장래에 소망을 주는 것이니라" (예레미야 29:1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실 때마다,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샬롬, 내니 두려워 말아라"
히브리서 기자도 12장에서 말합니다.
"너희는 불이 붙는 산과 흑암과 폭풍이 있는 무섭고 두려운 산에 이른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과 천만 천사가 기뻐하는 하나님의 도성에 이른 것이다"
두려움에서 평안으로, 심판의 어두운 산에서 밝은 하나님의 도성으로의 이 전환은 예수의 뿌린 피로 인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사망의 두려움에서 풀려나 생명의 길로 나아갑니다. 예수의 뿌린 피 덕분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뿌려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뿌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맡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도성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마음에 이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피를 뿌림을 받아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말합니다. 22절은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난다"고 말합니다. 악한 양심은 원어적으로 "무거운 짐에 눌린 양심"으로도 번역됩니다. 우리의 죄짐에 우리의 양심이 눌려 있을 때에, 예수의 피가 우리의 악한 양심, 아파하는 양심, 죄짐에 눌린 양심에 뿌려지면, 우리의 마음이 자유케 되고 우리의 몸이 깨끗하게 됩니다.
예수님에 의해 자유케 된 영혼은 자기 자신을 향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22절부터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해 말하는데, 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명백히 그 대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대상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기자는 진실된 마음과 확실한 믿음으로 나아가자고 권면합니다. 믿음의 특성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사랑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나와 함께 있기를 싫어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나를 구해주셨고,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고, 앞으로도 동일하게 나와 함께 하신다 약속하신 예수님이 확실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흔들리지 않습니다.
9개월 된 저의 아들은 마음이 불안하면 꼭 나에게 와서 내 다리를 붙잡고 웁니다. 제 다리를 붙잡고 우는 것은 자기를 들어올려 안아달라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붙잡고 우는 것은 저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에게 나아갔던 저는 자들, 병든 자들 모두 이러한 믿음으로 주께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담력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원천은 용기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확신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원천은 또한 소망입니다.
23절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약속하신 분이 미쁘시다는 말은, 믿음직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믿음직하실까요? 그는 약속하신 것을 쉽게 바꾸지 않고 반드시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이 미쁘다는 말은 독일어로는 treu이고, 영어로는 faithful입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신실하다고 표현하는 이 말은, 약속한 것을 지킬 때 주어지는 성품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약속을 꼭 지키는 사람을 우리는 faithful하다고 표현합니다. 믿을만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23절은 믿고 고백하는 이 소망을 흔들리지 말고 굳게 잡으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믿음과 소망이 동일한 원천을 가지고 있음에 대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은 과거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일들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즉 우리의 미래에도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확실한 예수님에 대한 기억만큼이나 확실한 예수님에 대해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망은 예수님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믿음입니다. 소망도 믿음처럼이나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고 성경이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소망은 믿음의 다른 이름입니다. 내 삶에서 faithful하셨던 예수님께서 앞으로도 faithful하셔서 나를 확실히 지켜주실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믿음이 소망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과 소망은 사랑에 원천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믿을 수 있었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소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주의 날이 가까이 올 수록 더욱 모이고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고 권면하라고 말합니다.
24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제가 참 존경하는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제자훈련을 받을 때 저는 학생이었고 그 친구는 간사였습니다. 그와 함께 사람들과 교제할 때면 그가 있는 모임에는 늘 예수님이 느껴졌습니다.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그 친구는 "그래서 너와 예수님의 동행의 여정은 어땠니?"하고 묻습니다. 묻는 이유는 그 교제의 시간에 서로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모임이 끝날 때 서로를 위해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며 기도하고 헤어졌습니다. 보통 시끌벅쩍한 모임을 하고 집에 오면 허무한 느낌이 들 때가 많은데, 이 경우에는 집에 오면 따뜻하고 충만한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 친구는 제가 올바르게 하지 않을 때에는 저를 권면하기도 해주었습니다. 25절에는 서로 "권하라"고 말하는데, 이는 서로 권면하고 경계를 주라는 의미입니다. 참된 공동체에는 따뜻한 위로와 함께 정직한 권면이 있습니다. 주께서 주시는 자유함은 방향을 가지는 자유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새롭고 산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내용은 우리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 열어주시는 새롭고 산 길은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의 미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은 늘 앞으로 가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가 자라서 겨자나무가 되는 과정으로 설명하십니다. 겨자씨는 겨자나무로 성장하는 것, 아이는 점차 자라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시간 속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물리적 시간이 흐른다고 겨자씨가 겨자나무로 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이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어주신 새로운 시간으로 우리가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새롭고 산 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시간입니다. 그 안에 우리가 날마다 새롭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의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고, 겨자씨가 겨자나무가 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에 가까이 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흔들리지 말고 주 안에 거하라. 그리고 서로 돌아보아 주 안에 거하게 하라.
예수님을 믿고 소망하라. 그리고 사랑과 격려로 서로가 예수님을 믿고 소망하게 하라.
히브리서가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