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혼자의 블로그 본문
일본 일주 여행에 가져갔던 소설을 방금 끝까지 읽었다. 삿포로로 향하는 주인공의 집념에서 나는 동질감을 느낀다.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던데 나는 1인칭 서술 시점의 덤덤한 그 감각 자체가 좋아서 종종 읽는다. 그는 교토 태생이라고 했다. 나는 늘 교토로부터 일본 여행을 시작하는 편인데 혼자로부터 출발해서 사람들을 지나가는 여정을 즐기기 때문이다.
혼자서 출발한 일주 여행을 마치고 2주도 지나지 않아 어머니를 모시고 교토에 갔다. 온천에 모시고 가서 나는 휴게실에서 만화책을 읽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스시를 먹고 난 후에는 내가 좋아하는 블루보틀에 갔다. 니시키 시장 옆구리에 있는 이 건물은 1층에 오래된 자전거 가게가 있어서 로컬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전거를 가지고 드나드는 공간에 함께 짜여져 있었다. 커피를 마시기 전에는 미즈노 매장에서 신발을 사 신었고 그 전에는 청수사에서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청수사 난간에서 시내를 내려다 보았다. 그 전에는 기온 거리에 있는 숙소에서부터 청수사가 있는 고조 자카까지 가옥이 늘어서 있는 한적한 길을 산보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갔지만 방은 2개를 잡았었다. 호텔 1층 로비 옆에는 푸딩 집이 있어서 저녁마다 우리는 푸딩과 북해도 소프트크림을 먹곤 했다. 혼자가 되면서도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독일에 살면서 개인주의에 기반한 공동체 감각을 향유하곤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그런 개인주의의 시간을 가지기가 어렵다는 느낌이다. 그럴 때 일부러 틈을 만들어 사람들과 나 사이에 완충지대를 만든다. 나는 혼자가 될수록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안아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완충지대는 내 팔이 만드는 너비이다. 혼자가 되면 그 너비는 누군가를 안아주는 품이 되기도 한다.
팀 잉골드는 선을 직조해나가는 것은 침투적인 매듭과 같다고 말했다. 그 매듭과 매듭들이 선을 단선적인 트랙에서 벗어나서 절합적인 그물망 구조를 (재)형성하게 돕는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전적으로 홀로인 존재 또한 관계망 안에서 혼자라는 양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혼자 또한 다른 사람들로 인해 가능하다. 다른 사람을 위한 존재가 홀로서기에서만 가능하듯이 말이다. 어쨋든 이 소설의 끝은 아침이다. 어두운 밤의 터널을 통과해가며 만나는 사건들을 경험하는 과정을 작가는 스텝을 밟아나가는 춤으로 묘사한다. 나는 책을 여러번 읽는 것을 좋아한다. 끝을 알고 출발하는 이야기는 더 많은 세부사항을 복기할 수 있는 여유공간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알고 있는 도시를 여러번 방문한 뒤에 가족과 함께 방문하는 것처럼 그것의 끝까지 가보았다는 것은 새로운 시퀀스에 대한 안정감을 준다. 끝을 가지고 출발하는 삶은 그래서 종말론적이다.
나의 가장 내밀한 생각은 늘 이 공간에 머물러 있다. 이 블로그는 가장 혼자가 되면서도 불특정 다수가 나를 스쳐가는 구분된 동시에 개방된, 가옥의 중정과 같은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