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52)
저녁의 꼴라쥬
나무가 잎새들을 찢는다 단풍이 핏방울처럼 맺히고날개 찢긴 나비마냥 은행잎들이 불시착한다 겨울 오는 길목 이렇게 고통의 모자이크로 수북하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벌거벗을 수록 나무의 형신이 십자가를 닮고 이상도 하지 찢어발길 수록 팡파레처럼 흩날리는 저 잎새들이 이 고통으로 어떤 형상을 꼴라쥬해 가는 것일까
사랑은 모든 자의 허물 위로 조용하게 덮인다 자기 허물로 외로워진 그 한사람 곁에서 조용히 함께 울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의 곁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곁에 있을 것이다 너를 믿는다. 고 사랑은 거듭 약속한다 허물이 벗겨질 때까지나 허물을 벗은 뒤에도 여전히 사랑은 순전하고, 그대로다. 사랑은 여전히 약함의 어머니이자 그대로 강함의 아버지이다 모든 연약의 엄마이며 모든 견딤의 아빠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스시 장인이 된다는 것과 같습니다. 무엇 하나 대강 하는 것이 없이, 적절한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향한 배열이 소중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돌멩이 하나의 위치도 정성스레, 바위가 땅에 박혀 있는 깊이의 정도에 대해서도 치밀하게 고민해보고, 다시 위치를 바꾸어보기도 합니다. 물줄기는 어디에 있어야 가장 쾌적한지, 어느 종류의 나무를 심을지, 그늘과 햇빛은 어느 정도의 비율을 이루어야 할지를 조정moderate해간다는 점에서 정원을 만드는 일에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만의 날 것의 언어를 상대방이 먹음직한 크기로 신선하고 창의적으로 보암직도 하게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의 영양적이고 미감을 자극한다는 측면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스시를 만드는 장인의 자세와 많이..
아르페지오의 행간으로 귀뚜라미가 들어와 운다 나도 여백이 있는 사람이고 싶다 손에 여전히 구멍이 나 있을 그사람처럼 아픔으로 큰 여백을 만들어 누군가의 연약을 쉬게 하는 빈 공간이 되어주고 싶다 오후 8:44 귀뚜라미와 함께 아르페지오를 치다가
죽은 살을 꼬집는 것이 인사인 지인이 있었다 코끼리 거죽과 같은 내 팔꿈치 살을 잡아 당기며 그는 말했다 "이 죽은 살을 꼬집는 게 제 애정표현이에요" 팔이 어쩐지 코끼리 코를 닮았다 코가 잡힌 듯한 기분이었다 팔꿈치가 잡히기 전 스스로 팔꿈치를 뒤집어본 적이 있었던가
구름의 출처는 지구 곳곳에서부터이다 때때로 그것은 북극의 녹아내린 유빙 한조각이었을 수도 있겠고 서울 하수도의 수분이었을 수도 있다 요즈음 유난히 가문 비를 보며 토고의 까까머리 아이의 수분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많이 흘렸던 눈물이 그 동네에 지나가던 그늘이 되어주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모르스 부호를 본다 모든 현상 안에는 모르스 부호가 있다 이를테면 문서 안의 깜박이는 커서는 무언가 전언할 것을 재촉하는 신호이고 나와 너의 눈꺼풀의 깜박임은 우리가 건조하다는 신호이다 불 꺼진 방 안에 형광등은 자신의 잔영으로 여전히 불안한 깜박임을 지속하고 있다 나는 재즈 피아니스트의 건반을 떠올린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처럼 이 깜박이는 형광등도 좀처럼 수면 밑으로 가라앉지 못한다 그의 관자놀이에 다크서클이 검버섯처럼 피어오른다 천정 너머에는 모르스 부호들이 가득했던 시절이 있었다 해변의 모래처럼 쏟아진 밀크처럼 가득했던 때가, 지금은 우리의 세상은 사탕같은 불빛들로 가득하다 밤하늘에는 금방이라도 익사할 듯한 흐려진 의식들이 깜박, 깜박 잊혀진다 형광등의 다크서클처럼, 깜박, 깜박 전언할 것을 ..
비가 내리면 박수치는 소리가 들린다 손 한 뼘 다른 한 뼘이 만나 소리를 만들듯 비가 내리는 시간은 하늘 한 뼘 땅 한 뼘이 만나 박수를 치는 시간이다 땅은 원래 하늘의 다른 한 뼘이라는데 그 뼘이 지저분할 때가 참 많아 이다지도 비가 내리는가 보다 그런데 이상하지, 관중이라도 있는지 다른 그 한 뼘 씻기우는 때마다 박수갈채 소리가 하늘에 땅에 가득하다
여름이 오는 기미를 당신은 미리 오는 흙내음으로부터 알아차리겠지만 반대로 겨울은 지나고 나서야 맡을 수 있는 냄새들이 있다 냉냉한 귤을 까먹는 손톱 속에 귤냄새가 배었던 것과 건물 어귀를 도는 시린 바람 속에 풀빵 냄새가 숨어 있었다는 것은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추억을 통해 맡을 수 있는 것들이다 인간이란 그제서야 알게 되는 것이다 겨울의 시간들은 해동되어지고 난 뒤에야 해독되어진다는 것을 진주조개는 자신이 한껏 움츠렸던 아픔의 첨예함 만큼 놀라운 것이 자기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죽기 전까지 이해하지 못한다 누구도 스스로 시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책장의 공동 책장에서 양장본 시선집을 꺼내 선 채로 시를 읽었다 1920년부터 2000년까지 페이버릿인 시인들을 골라 읽고 다시 집어넣으려는 순간 끝 페이지에 있던 문제풀이가 페이지 밖으로 튀어나온다 '제 8연에서 시인이 부끄러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인이 부끄러워 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 시를 읽었나 싶어 당혹스럽기도 하고 8연의 시를 7연처럼 읽어놓고 시집을 반으로 접어놓는 일이 많아 시집 하나가 빠진 공동 사이로 손을 넣고 한참을 우두커니 있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