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52)
저녁의 꼴라쥬
난독증에 걸린 시인이 있었다 연약한 다리가 활자들 사이에서 다리를 찾지 못해 행간으로 미끄러질 뿐이었다 책은 이해될 수 없는 말들의 성단이어서 초대받지 못한 외계인처럼 별들 위를 선회비행하며 행간에 끼어 살았다 난독증이 완화된 것은 말을 다시 배우면서부터였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 그러나 노역자들은 말이 아닌 바벨탑을 쌓아 올렸고 이제 말은 다리가 아닌 뾰족하게 솟은 가시이다 시인이 혓바늘을 뽑아내지 않으면 페가수스 성운을 뽑아낸대도 말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우울한 외계인처럼 그의 행간에만 체류할 것이다
모르스부호는 언제나 너의 바깥에 있다.이를테면 노트북 안의 깜박이는 커서는 무언가 전언할 것을 재촉하는 신호이다. 나와 너의 눈꺼풀의 깜박임은 우리가 건조해졌다는 신호이다. 불 꺼진 방 안에 형광등은 자신의 잔영으로 여전히 깜박깜박 점멸하고 있다.불면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처럼 이 활발한 형광등도 좀처럼 수면 밑으로 가라앉지 못한다. 그의 관자놀이에 다크서클이 검버섯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른다.밤하늘에 모르스 부호들이 빼곡했던 시절이 있었지, 지금 우리의 세상은 사탕 불빛들로 가득해.24:00 하늘에는 금방이라도 익사할 듯한 혼미한 의식들 뿐이다. 간혹 명료한 빛을 보더라도 에이, 인공위성이 아닐까. 생각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지
나희덕 시인께서 드디어 신학교에 오셔서 문학 강의를 해주셨다.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질문들이 화산의 라바처럼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아서 차마 공개적인 질의응답 시간에 하지 못하고 강의가 끝난 뒤에 집에 가셔야 하는 교수님과 시인을 붙잡고 이것저것 질문공세를 해버렸다.사실은 시에 대한 컴플렉스 내지는 억압기제가 있었나 보다.그 기원은 나의 지인들에게서, 그리고 뛰어난 역량을 가진, 동시에 그 세밀한 조탁 능력 때문에 다소 주관이 뚜렷한 작가인 친구에게서 발원하는데, 나의 내면에는 이미 타자의 시선이 내장되어 있어서 자기 검열작업이 나의 시에 끊임없이 칼질을 해댔던 것이다. 미용실에서 정형화된 팜플렛 속의 헤어 스타일에 국한되어 선택하는 사람의 심정처럼, 나는 자가예프스키가 말했던 시의 미친 달리기를 버리고 '..
하나님의 사랑은 불타고 있다 줄곧 불타는 것은 진실되다 나의 심령은 곧잘 구부러지는 마른 나무 가장 갈구하는 진실을 진실되지 않게 갈구하는 나의 심령은 태워지길 거부하는 가시덤불 우거진 공동의 묘지 그 불이 고모라를 태우기 전까지 수도원이 아니다
겨울이 깊고 별이 빛나는 밤 날이 찹다, 그래도 먼 데 있는 별이 다 보이고 가난한 동네는 별들이 만개한다
우리는 시끄러움을 찾는다 고요함 중에 다시 찾아올 갈망으로부터의 피난길에 올라 인파 속으로 숨어 군상이 되고자 하는 것도 내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기 때문 진통제, 할렐루야, 스마트폰, 페이스북 진통제, 할렐루야, 스마트폰, 페이스북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사람들은 덜컹거리는 감각도, 소음도, 옆사람의 얼굴도 지워버리고 공복감만을 느끼는 것이지 그들은 몰두하길 원해, 피로감을 피해, 너도 방심하지 말고, 어서, 스마트폰 속으로 내부의 장기에 청진기를 대는 대신 외부의 장기에 이어폰을 꽂고 제프 버클리를 마주할 엄두가 안나는 것은 이 가수는 사랑에 대해 지나치게 진실되고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이지 자, 이리와 어서, 바보같은 소리는, 치우고 신나는 노래나 같이 듣자고 진통제와, 할렐루야, 스마트폰과, 페이스북..
영이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제 3으로서의 속성이 아니라 지성 안에서 그것을 활력있게, 감성 안에서 그것을 활력있게, 그리고 무엇보다 그 둘이 서로를 끌어안게 하는 힘이다 나는 인력의 힘을 가지게 하는 그 무엇이다 그러나 모든 물체가 인력을 부여받은 뒤에도 어긋나고, 뒤틀리고, 탈골되기만 해왔다 깨진 이빨로 웃는 지성과 주저앉은 코로 우는 감성 지성은 고독하게 오만의 높은 산을 올라왔고 감성은 방탕하게 무지의 넓은 길을 헤매왔다 그 둘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가며 영이 말한다 : 무지하다면 차라리 입을 열지 말아라, 이치를 가리기만하는 지성이여, 너의 성난 파도는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라, 도무지 만족을 모르는 감성이여, 그러나 어느 순간 영이 지성을 동트게 하고 감성의 빗장을 풀 때 사람들은 웃으리..
백금같이 명징하던 해가 호박죽처럼 초라해지는 시간 왕자가 거지가 되고 늑대가 개가 되며 나약해지고, 깨지고, 부들거리며, 우울하고, 어둡고, 괴로워지며, 쥐어짜는 시간 사랑에 빠진 이들의 심장처럼 곤죽이 되고, 과부하가 걸린 노트북처럼 버벅이고, 방금 꺼진 형광등처럼 놀란 맥박들이 어리둥절하고, 조용한 확신으로 기쁨의 칸타타를 흘려보내던 정원이, 시끄럽도록 슬픈 혼혈아들의 뉴올리안즈 재즈 놀이터로 변한다 윤곽이 흐릿함에도 질료는 그대로 있고 각자가 차지한 공간도 침노당하지 않았으나 빛이 아닌 어둠 속에서 세계는 비로소 벌거벗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어둠 속으로 당신의 조각들을 넘겨주기 전에, 아직 점멸하는 횡단보도의 보행자 신호처럼 의식과 기회가 남아 있을 때에. 윤곽선과 흐릿함이 동시에 살아 있는..
어제로부터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있어, 새벽은 어둠의 깨어짐 같은 것이다 어둠이 깨지면 술에서 깨어야 함을 직감하는 것이다 오늘의 아침은 침침한 별빛같아 보였지만 익사하지 않은 이들의 것이다 눈이 감길 때마다 다시 눈을 뜨는 그 치열한 점멸이 무언가를 긴박하게 전언하는 커서의 깜빡임처럼 어제의 사람들 사이에서 반짝인다 어제의 사람들 사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