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기억은 과거를 현재로 불러들이는 작업이다. 그 순간의 감각, 말, 공기, 불빛들이 되살아난다. 그리움은 기억의 세포를 농후하게 한다. 독일 학교 도서관에는 카페테리아가 외부와 연결되는 회전문이 있었다. 학생들이 샐러드 볼을 들고 잡담을 하면서, 담배를 피우면서, 노트북을 키고, 와하핫, 웃는 소리가 정원에 가득하다. 독일 커피는 고유의 색과 농도가 있다. 식사를 하러 철학부 학생식당으로 가는 언덕 길 나무에서 체리를 따먹었다. 풀밭에 앉아 점심식사를 했다. 커피는 거른 적이 없다.쾰른을 지나 네덜란드 국경으로 들어서면 푸른 띠를 두른 노란 기차가 나온다. 암스테르담 셀트랄에서 터져나오는 소란함, 수없이 탔던 트람, 수없이 걸었던 운하, 수없이 먹었던 감자 튀김의 냄새를 나는 재현할 수 있다. 그래서 기억..

나의 유학의 마지막은 기차여행이었다. 베를린을 거쳐 함부르크에 도착한 나는 코펜하겐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기차는 북독일에서 기술상 문제로 정차했다가 접경지역을 지나 활처럼 생긴 덴마크 반도를 가로질렀다. 내 기차는 29유로짜리였고 숙소는 40유로짜리였다. 가진 것이 없어도 떠나고자 하는 열망만으로 시작되는 여행이 있다. 뉴욕에서 1불짜리 핫도그를 파는 스트리트를 찾아 헤맬 때와 자전거로 한참을 달려서 도착한 네덜란드 도시에서 60센트 짜리 빵을 사먹던 때가 있다. 고생은 다 이야기거리가 된다.결핍에서 생겨나는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독일 골목 허름한 빵집의 빵냄새, 등이 굽은 안토니오 씨가 화덕에서 마르게리따 피자를 꺼내어 아무렇게나 6등분하여 내놓고 에스프레소를 낡은 머신에서 뽑아 마..

일본 일주 여행에 가져갔던 소설을 방금 끝까지 읽었다. 삿포로로 향하는 주인공의 집념에서 나는 동질감을 느낀다.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던데 나는 1인칭 서술 시점의 덤덤한 그 감각 자체가 좋아서 종종 읽는다. 그는 교토 태생이라고 했다. 나는 늘 교토로부터 일본 여행을 시작하는 편인데 혼자로부터 출발해서 사람들을 지나가는 여정을 즐기기 때문이다. 혼자서 출발한 일주 여행을 마치고 2주도 지나지 않아 어머니를 모시고 교토에 갔다. 온천에 모시고 가서 나는 휴게실에서 만화책을 읽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스시를 먹고 난 후에는 내가 좋아하는 블루보틀에 갔다. 니시키 시장 옆구리에 있는 이 건물은 1층에 오래된 자전거 가게가 있어서 로컬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전거를 가지고 드나드는 공간에 함..

숙소에서 머핀과 커피를 아침으로 하고 우버를 타고 도쿄 역으로 향했다. 어제 저녁부로 도카이선이 운휴하였고 도호쿠선까지 운휴할 가능성이 생기면서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신칸센 승강장으로 향했다. 미래는 의뭉스럽다. 시게키 상은 우리는 내일을 모른다고 말했다. 다행히 기차는 하코다테까지 열심히 달렸다. 후쿠시마와 센다이 지역을 지나고 모리오카와 아오모리를 지나 하코다테에 다다르자 개찰구 앞에 시게키상이 있었다. 우리는 성게가 포함된 스시를 먹고 모토마치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츠타야 서점에 가서 나는 만화책과 음반을 샀다. 옆에서 차분하게 기다려주는 시게키상이 아버지처럼 느껴졌다.나는 누군가의 아들이었다가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었다. 살아가면서 배역이 스위칭될 때가 있다. 아들이었던 사람이 아버지가 되고..

5시에 눈이 떠졌다. 숙소 근처의 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드리고 청수사와 난젠지 일대를 산책했다. 수로각 아래 앉아 한참을 빗소리를 들었다. 정주하기 위해 온 여행에서 나는 이 땅의 것들의 덧없음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지나가야 다가오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고 교토에 머무를수는 없다. 거대한 수증기가 나를 추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덧없지만 위협적인 바람을 피해 신칸센을 타고 도쿄로 향했다. 거센 비로 인해 나고야 부근에서 발이 잠시 묶여 있었지만 비교적 무사히 도쿄에 도착했다. 그날 저녁 뉴스에서는 내가 건너온 도카이선을 운휴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우연의 일치인지, 내 트랙리스트에는 파도의 포말이 그려진 힐송의 독일어 버전이 있었고 이날 나는 호쿠사이의 파도 그림을 보았다. 우버를 타고 기요스미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