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3분 10초대부터 심각하게 몰입한 안경재비를 보라.건반을 두드리는 빌리를 보면 타이프라이터기를 치는 작가가 연상된다. 피아니스트의 왼손은 화성을 제시하고 오른손은 제시된 화성으로 방향타를 잡고 멜로디의 집을 건설해간다면작가는 왼손으로 만든 자음의 활에 오른손으로 ㅏ ㅓ ㅗ ㅜ등의 모음의 화살을 맞춰 작가 자신의 상상력이 겨냥하는 정확한 지점으로 언어를 쏜다.이 둘의 공통점이라면 자신이 쏜 화살이 과녁을 제대로 맞출 것인지, 의도했던 건축이 완공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한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벽돌을 쌓아 올리고, 화살을 쏘아대고 있다는 것이다.
연극을 보면 배우들의 대사나 행동이나 소품이나 죄다 허공을 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것이 곧 연극의 벽이자 한계다. 이러한 한계는 다른 장르와 경계를 그어주는 역할이 되어준다. 이 허공은 TV 드라마나 영화 미디어들과의 간극의 공간이기도 하고 대본이 무대 위로 그대로 올라오는 바람에 따라오게 된 문자와 문자들 사이 행간의 생경한 노출이기도 하다.
나는, 말하자면, 며칠전 내 모든 데이터(블로그 상과 워드의, 휴대폰의 데이터)를 삭제해버렸다. 몇달째 데이터 상으로 식물인간처럼 잎을 피지도, 말을 하지도 않는 글들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내게 그 글들이 너무나 추잡하고 오염돼 보이는 것이었다.이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가. 스스로 창작해놓은 것들이 모두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문득 알아버리는. 말하자면 낙옆 직전에 추잡하게 붙들린 잎새같이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계륵같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때가 있다. 바지주머니에 시적 영감을 적어놓은 쪽지를 정성스레 접어 넣어두었다가 한참동안 그것을 꺼내어 쓰는 것을 잊어버렸으며 결국엔 세탁기 속에서 발견하게 되어버리는 그런 때 말이다. 잘라야 한다. 시들은 것들을, 새 것을 위해서. 집착을 버리고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