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바이마르에 어제 다녀왔다. Haltestelle에서 목사님께 최근 일주일간 밤에 대여섯 번은 자다 깬다고 말했다. 목사님은 내가 어딘가에 매여 있는 것을 확인시켜 주셨다. 자유한 사람은 문제가 해결될 때 자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현실성을 누리는 사람, 더 능동적으로는 자유의 현실성을 부리는 사람이다. 문제가 해결되어야 잠이 다시 잘 오고, 자유하다고 생각하면 그 문제는 언제나 나를 이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 이전에 이미 내가 그것을 넘어서고 있음을 누려야 한다. 현실도피로서가 아니라, 현실을 창출해내는 삶이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다.다시 예나에 돌아왔는데, 일찍 잠에 들었다. 이른 새벽에 한번 깬 것 말고는, 아침까지 오랫만에 푹 자고 일어났다. 다시금 깨달은 것이, 매인 사람 옆..
오늘은 프랑스 빵집에서 카푸치노와 크로와상을 아침으로 삼았다. 옆의 여성 두 분이 의자가 하나밖에 없어서 주저하고 있길래 내 의자를 내어주고 나는 더 구석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sehr nett” (참 친절하시군요!)아직 열기가 뜨겁게 남아있는 커피 잔을 감싸며 생각해본다. 호의적인 것은 일종의 온도가 있으며 냉담한 것도 그러하다. 랭보는 지옥은 확실히 아래에 있다고 했는데, 그 지옥은 분명히 외롭고 스산할 것이다. 함께 함의 온도와 동떨어짐의 온도차는 확연하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전적으로 혼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손사래를 칠 것이 분명하다. 반대로 함께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때로는 조용하게 골목 길이나, 정원 속을 거닐기를 원할 것이다. 카푸치노로 따뜻해진 손과 배..
요즘은 꽉 찬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아침에 보통 6시나 6시 30분 정도에 일어나서, 빵과 커피를 먹고 독일 초등학생들로 가득한 버스를 타고 시내에 도착해서 라틴어 수업이나 독일어 수업으로 하루를 시작하곤 한다.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으로 와서 칼 바르트를 읽거나, 라틴어 공부를 하다가 점심을 먹고 다시 수업에 들어가든지 논문을 준비하든지 하는 일과가 반복되고 있다. 반복되는 일과는 거룩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어떤 일을 어제도 하고,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하게 된다는 것. 그 동일성의 지속이 삶의 리듬이 되어간다는 것은 경외감과 감사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공부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시편의 Hörbuch를 듣거나, Lutherbibel을 읽거나, 재즈를 듣는다던지 하는 시간은..
사과가 빨갛게 익어가듯이 산도 빨갛게 익는다. 성숙Reifen이라고 하는, 무르익음을 위해서는 시간이 소요된다. 봄에, 여름에 보았던 집 앞의 사과나무의 열매들이 가을이 되어서야 빨갛게 익어가는 것을 본다. 참 느리다. 그 과정을 계속 지켜본 나로서는 참 느리다, 답답하다, 도대체 언제? 등의 생각을 하게 된다. 독일에 온지도 꽉 찬 8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에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교회교의학의 시간론을 반절을 읽은 것과, 오블라우의 책을 반절을 읽은 것, 박사논문의 윤곽을 반절 정도 잡은 것, 어학원을 반절 정도 마친 것 등이 있고, 기도가 무르익기 시작한 것, 책들을 읽어가는 것, 자전거를 두 손을 놓고 타기 시작한 것, 커피를 마시는 무수한 날들과, 여행을 하며 겨울의 암스테르담의 보도블럭과..
요즘은 6시 30분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루터비벨로 성경을 두 장 정도 읽고 나서, 뮈슬리 등으로 아침식사를 하는 것으로 하루 일상을 시작하곤 한다. 여력이 되면 티비에 연결된 크롬캐스트를 통해 jtbc 뉴스룸을 보기도 한다. 체력은 먹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통해 유지된다. 가능하면 더욱 자주 자전거를 타려고 한다. 집에서 나와 시내 도서관에 도착하기까지 20분이면 충분하니 아침 저녁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능한한 학생식당에서 샐러드와 육류 등으로 영양을 섭취하는 것이 건강을 유지하는 길일 듯 하다. 아침에는 바르트의 KD III/2를 읽고, 오후에는 Oblau의 책을 읽는다. 중간에는 점심식사를 포함해 최소 1시간 30분 정도의 휴식을 취하려고 한다. 머그잔에 커피를 받아 도서관 앞 뜰 나무 아래서 멍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