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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꼴라쥬
논문을 쓸 때면 깊은 숲에 들어와 있는듯한 고요함을 느낀다. 실제로 이 장소는 깊은 숲과 같다. 삼나무처럼 곧고 지긋한 책들에 둘러싸여서 천천히 산을 오르듯 후설의 사유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적막함을 넘어서 고요함이 시작되면 내 영혼은 잠잠하게 빛난다. 늘 고요하게 내달리지는 못한다. 특별히 사람을 만나야 할 때 그렇다. 그럴 때마다 집 밖으로 달려나가지 못하는 큰 개처럼 끙끙거리곤 한다. 그런 나를 창조주는 무척이나 섭하게 여긴다. '자, 이제 제 일을 해야지요'라고 말하는 나에게 늙은 어머니만큼이나 서운해하시는 것이 느껴진다. 나의 것을 주장할 수록 당신이 머물 공간이 내 안에서 줄어든다. 선물로 받은 시간이 허다한데도 그 빈 공간을 스스로의 것으로 채우려고 고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항복하기 전까..
느리게 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느린 시간을 보내야만 했었던 걸까? 그것이 어쩔 수 없음이었다면, 그것은 변명이 아닐지는 모르나, 허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 고치를 탈피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온도가 쌓이며 나를 품어야만 했는가. 분명한 것은 그 품어짐으로 인해 나도 다른 허물들을 조금이나마 품는 법을 배우고, 느리지만 함께 그 시간을 통과하는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 애초부터 잘 달리는 경주자였다면 주위를 둘러보는 긍휼이 내 안에 싹 틔울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지금의 시점은, 이러저러함의 시덥잖음들을 조금은 시원하게 벗어던질 때라는 것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느리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속도를 찾고 싶었다. 나는 느린 사람인가, 빠른 사람인가. 나 자신 안으로 천착할 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