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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꼴라쥬
나는 항상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해왔다. 현상학적 발생에 대한 두려움이랄까. 그러한 감각들이 현시되면 마치, 뭐랄까 죄를 지은 것처럼, 선악과를 먹은 후의 눈이 밝아짐의 느낌이랄까, 존재의 장이 개방되어지면서 일단의 두려운 감각이 먼저 발생하였던 것이다. 파도치는 불안하고 거친, 바다의 날씨가 그 장에 음습한다. 금방이라도 삼켜질듯한 그곳에 내가 정초할 수 있는 자리는 없어 보인다. 그곳에 가본 적 없느냐고? 글쎄, 여러번 나가보았고 수차례 파도와, 암초와, 나쁜 기후와 싸워보았고 실존적인 가치로 빛나는 여러 파편들, (파편들, 파편들) 을 얻어내기에 이르렀지. 그런데 문제는 바다에 나아가고 나면 방향타를 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표류라고도, 항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알수없는 행위를 나는 내 외부의..
두려움이 먼저 사라져야 한다. 이 두려움은 율법에서 온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를 질식시키고 모든 아름다운 가능성도 함께 박탈시킨다.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두려움을 피해 숨으려 한다. 그러나 의지만으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으며 오히려 로마서 7장의 말씀처럼 죄 아래 팔리는 것을 본다. 무엇이 죄인지를 알게 되면 더더욱 그 죄를 피하면서도 그 죄 아래 팔리게 되는 모순의 존재가 인간이다. 로마서 8장의 대전환처럼 우리에게는 힘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항복하는 것이 생명을 향한 열쇠가 되어준다. 항복은 7장까지의 흐름처럼 내가 '어느 정도' 죄인이 아니라 '뼛 속까지 더러운' 죄인이며 그 모든 실행되지 않은 죄가 이미 가능태로서 내 안에 죄다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미 살인이 내 안에..
시를 쓴다는 것은 스시 장인이 된다는 것과 같습니다. 무엇 하나 대강 하는 것이 없이, 적절한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향한 배열이 소중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돌멩이 하나의 위치도 정성스레, 바위가 땅에 박혀 있는 깊이의 정도에 대해서도 치밀하게 고민해보고, 다시 위치를 바꾸어보기도 합니다. 물줄기는 어디에 있어야 가장 쾌적한지, 어느 종류의 나무를 심을지, 그늘과 햇빛은 어느 정도의 비율을 이루어야 할지를 조정moderate해간다는 점에서 정원을 만드는 일에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만의 날 것의 언어를 상대방이 먹음직한 크기로 신선하고 창의적으로 보암직도 하게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의 영양적이고 미감을 자극한다는 측면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스시를 만드는 장인의 자세와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