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어떤 것이 망가지는 경험을 하면, 내 안에 원래부터 자리하던 비존재에 대한 감각이 뚜렷해진다. 며칠 영문을 모르고 계속 잠을 잤다. 잠시 아파 누워 있는데도, 바깥을 아예 나가지 못하고 몇달간 격리되어 있던 코로나 시절의 기억의 상흔들이 전부 되살아나며 나를 그레고르 잠자와 같이 사회로부터 버려진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내내 구름이 가득했다. 아침에 학생식당에서 소세지와 샐러드를 먹고, 신학부 도서관에 짐을 넣고 산책 겸 언덕을 올랐다. 험한 경사로를 오르며 지인과 헐떡이는데 험한 인생길을 함께 걷는 은유처럼 느껴졌다. 망가지는 경험은 대체로 무언가를 상실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아픈 와중에도 시험을 앞두고 두 주나 결석하게 된 프랑스어를 걱정했다. 생각치 않게 빠져나가는 병원비와,..
빌립보서 3:7-21 1 저는 미술관을 가는 것을 참 좋아해서 어떤 도시에 가면 미술관을 주로 방문하는 편입니다. 몇 주 전에 지인 목사가 있는 드레스덴을 방문하게 되면서 그곳에서도 미술관을 잠깐 가게 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미술관에서 아주 특별한 그림 하나를 2주간만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다음과 같이 생겼습니다. 이 그림의 이름은 네덜란드의 화가 베르메르의 입니다. 여러분은 이 여인이 어떤 편지를 읽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이 편지는 밝은 내용의 편지일까요, 어두운 내용의 편지일까요? 그림에는 별다른 단서가 없고 우리는 추측할 뿐입니다. 베르메르가 이 그림을 그린 후 이 그림은 네덜란드 델프트를 떠나 독일 드레스덴에 줄곧 소장되어 있었는데, 드레스덴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존하고 ..
흔적들이 겹쳐지면 의미를 형상화한다. 나는 튀빙엔 대학 도서관에 앉아 있다. 아침 7시에 출발해서 12시 30분이 되어서야 기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네카 강 옆의 중국 식당에서 회과육을 먹고, 골목들을 걷고, 또 걸었다. 골목의 어느 순간 순간 7년 전 기억의 부분들이 재생이 되었다. 이곳을 겨울에 오는 것은 처음이다. 관광객도 없고, 햇살도 없고, 상점들도 문이 닫힌 몇천년의 고도를 걸으며 역사성을 되새기는 시간이었다. 몇천년을 지나면서 사람들이 남긴 흔적들은 겹치고 겹치며 역사성 자체를 형상화한다. 단순히 어떤 가게와 집들과 거리로 이루어진 공간을 넘어 수많은 시간을 지나며 형성되는 긴 지속duree longue의 멘탈리티 같은 것까지 느껴지는 겨울의 아침이었다. 천년고도를 방문하면 역사적 의식의 ..
논문을 쓰다가 페이지 수가 너무 안나와서 고민을 지인에게 나누니 박사논문 구격에서의 줄 간격이 1.5라는 말을 들었다. 줄 간격을 변경했더니 놀랍게도 페이지 수가 1.5배 늘어버려서 강제로 논문의 막바지에 이르러 버렸다. 며칠 전 꿈에서 선배가 나에게 앞으로 17페이지. 라고 말했을 때 남은 페이지 수가 71페이지나 되었었는데, 줄 간격을 바꾸고 나니 정말로 200페이지에서 17페이지 부족한 상태가 되었다. 나의 석사 논문 주제는 시간성이었다. 이 주제 설정의 이유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때문이었다. 사람은 왜 있다가 사라지는가. 그리고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박사 논문 주제 역시 시간성이지만 나는 더 깊은 곳에 들어와 있고 논문을 시작하던 2017년, 아니 20..
드레스덴에 다녀오면서 매우 우연히 베르메르의 를 보게 되었다. 이 그림을 이전에 보았을 때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고 느껴졌다. 알고 보니 소녀 뒤에 있던 큐피트의 그림이 복원되었다고 한다. 큐피트의 그림이 복원되고 나니 그림의 해석이 달라졌다. 이전에 이 그림을 보았을 때에는 매우 어두운 분위기에서 어떤 여인이 알 수 없는 편지를 읽는 주제라고 파악했었는데, 큐피트의 부활로 말미암아 소녀가 읽는 편지는 사랑의 편지가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큐피트의 액자의 부활로 그림의 전체 구도 또한 안정화를 이루었다. 베르메르는 그림 속에 주제를 암시하는 장치들을 배치해서 구도와 서사 모두를 추구하는 화가이다. 역사적 복원 작업이 의미의 재형상화를 이루었다. 의미는 내가 부여하는 것만이 아니며, 내 앞에 놓여진 것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