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무서운 짐승이 걷고 있어요 무서운 짐승을 숨겨주는 무서운 숲이 걷고 있어요 무서운 숲의 포효를 은닉해줄 무서운 새의 비명이 번지고 있어요 그곳에서 해가 느릿느릿 뜨고 있습니다 침엽들이 냉기를 버리고 더 뾰족해져요 비명들은 어떻게 날카로울까요 동그란 비눗방울이 터지기 직전에 나는 어떤 비명을 들었습니다 이 비명이 이 도시를 부식시킬 수 있으면 좋겠어요 너무 많이 사용한 말들이 실패를 향해 걷습니다 입을 다물 시간도 이미 지나쳐온 것 같아요 숲의 흉터에서는 버섯이 발가락처럼 자라나고 있어요 이 비명과 어딘가 비슷하군요 달이 사라지기 전에 해가 미리 도착합니다 함께할 수 있는 한 악착같이 함께해야 한다는 듯 나무가 뿌리로 걸어와 내 앞에 도착해 있습니다 무서운 짐승보다 더 무서워요 무서운 것들은 언제나 발을 ..
뉴저지는 참 아름다운 곳이다. 나는 보통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보거나, 아이팟에 존 콜트레인의 음악을 담아 적당히 비가 온 다음날 아침이면 근처 시세이도에서 산 나막신을 신고 산책을 하곤 했다. 동네 주민들은 호기심어린 미소를 지으며 따각따각 소리가 나는 내 발을 쳐다보았다. 산책이 끝나면 찻잔에 차를 담아 마시곤 했는데 비오는 날이 좋았다. 일주일에 한번은 뉴욕에 갔다.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10분 정도를 달리면 버클리-하이츠라는 이름의 소박한 기차역이 나온다. 이곳의 건물은 대부분 1층이다. 맥도날드도, 킴스 클럽도, 영화관도, 기타 샵도 모두 나름의 색과 모양을 지니고 있다. 뉴욕에 가면 꼭 미술관을 찾았다. 돈이 많지 않은 세탁소 알바생인 나는 미술관 앞에 있는 2불짜리 핫도그로 요기를 하곤 했..
나는 교회가 거할만한 '넓은 방'weiten Raum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그리스도인들을 나그네로 대하지 않고 게스트로 환대하는 '거할만한 넓은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지금 가진 찻잔이 부족할 정도로 게스트들이 친구들이 되고, 사귐을 가지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음. 교회는 게스트하우스가 되는 것이 맞다고 본다. 환대의 열린 장소, 생명들이 만나 생동하는 지평.
현대인, 특별히 도시인에게 사유가 결핍된 원인은 사유할 공간이 없어서이다. 자연의 부재이기도 하고, 비언어적인 감각을 배양할 장소의 부재이기도 하며, 세계 안의 오솔길을 단독자로서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자기만의 방은 있을지 몰라도, 자기만의 넓은 장소는 없다. 모든 공원과 숲은 사람들로 우글거린다. 너에겐 자연의 움직임보다 온갖 기계들의, 기계적인 지나친 움직임들이 부딪히는 그곳이 공간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그러나 그곳은 공간이라 할 수 없다. 그곳에서 너는 모든 타자들을 기계적인 비존재로 인식한다. 이방인은 너에게 생명으로 느껴지지 않고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한, '세계 밖' 존재로 여겨진다. 너는 타자들을 그곳으로 몰아낸다. 너조차도 철저히 생명의 리듬이 아니라 기계의 리듬에 프로그램되..
난독증에 걸린 시인이 있었다 연약한 다리가 활자들 사이에서 다리를 찾지 못해 행간으로 미끄러질 뿐이었다 책은 이해될 수 없는 말들의 성단이어서 초대받지 못한 외계인처럼 별들 위를 선회비행하며 행간에 끼어 살았다 난독증이 완화된 것은 말을 다시 배우면서부터였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 그러나 노역자들은 말이 아닌 바벨탑을 쌓아 올렸고 이제 말은 다리가 아닌 뾰족하게 솟은 가시이다 시인이 혓바늘을 뽑아내지 않으면 페가수스 성운을 뽑아낸대도 말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우울한 외계인처럼 그의 행간에만 체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