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글에 대한 구조화 작업이 이제 나에게는 적실하다.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에 올린 글은 위성체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중 많은 것은 그저 우주 쓰레기와 같은 사유나 정서의 부유물일 것이다. 단순한 노력을 넘어서서 이제는 성실성과 근면성이 또한 필요되어지는 것 같다. 사실, 페이스북이나 메모장, 에버노트에 끄적이는 글들은 말 그대로 끄적이고, 깨작이는 것이다. 나는 문장을 다듬지 않고, 단어를 고민한다기 보다는 창출하고, 결론을 내기 보다는 항해하고 임시 정박하여 글을 ‘쉽게’ 포스팅해왔다. 그러나 그러한 글들을 누가 가치있는 사유로 볼 것인가? 사유하던 것을 발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며 느끼는 것은 발화한 것이 담화 조차로도 이동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광장에서 소리치는 ..
1여행의 기술에서 암스테르담을 언급하며 알랭 드 보통은 a 뒤에 a가 연이어 붙는 aa 의 이국성에 대해 호기심어린 어조로 이야기한다. 영어 교육을 받아온 한국인으로서 나에게는 독일어의 ei의 발음이 그러한 느낌을 주는데, ‘에이’라고 발음해야 할 것 같은데 ‘아이’라고 발음하는 순간, 음절들이 케미스트리를 이루는 일반적인 방향에 역회전이 걸린듯한 새로운 감각으로서의 쾌감이 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네덜란드에서는 i 다음에 j가 오게 될때 기묘하게 미끄러지며 ‘얘이’와 ‘예이’ 혹은 희뿌연 ‘야이’의 그물망 사이의 어딘가에 그 발음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나에게는 그 발음이 이렇게 복잡다단한 모호성의 긴장의 역학으로 다가오지만, 정작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냥 ij로서의 명료한 지점을 믿고 ..
나는 항상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해왔다. 현상학적 발생에 대한 두려움이랄까. 그러한 감각들이 현시되면 마치, 뭐랄까 죄를 지은 것처럼, 선악과를 먹은 후의 눈이 밝아짐의 느낌이랄까, 존재의 장이 개방되어지면서 일단의 두려운 감각이 먼저 발생하였던 것이다. 파도치는 불안하고 거친, 바다의 날씨가 그 장에 음습한다. 금방이라도 삼켜질듯한 그곳에 내가 정초할 수 있는 자리는 없어 보인다. 그곳에 가본 적 없느냐고? 글쎄, 여러번 나가보았고 수차례 파도와, 암초와, 나쁜 기후와 싸워보았고 실존적인 가치로 빛나는 여러 파편들, (파편들, 파편들) 을 얻어내기에 이르렀지. 그런데 문제는 바다에 나아가고 나면 방향타를 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표류라고도, 항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알수없는 행위를 나는 내 외부의..
모르스부호는 언제나 너의 바깥에 있다.이를테면 노트북 안의 깜박이는 커서는 무언가 전언할 것을 재촉하는 신호이다. 나와 너의 눈꺼풀의 깜박임은 우리가 건조해졌다는 신호이다. 불 꺼진 방 안에 형광등은 자신의 잔영으로 여전히 깜박깜박 점멸하고 있다.불면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처럼 이 활발한 형광등도 좀처럼 수면 밑으로 가라앉지 못한다. 그의 관자놀이에 다크서클이 검버섯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른다.밤하늘에 모르스 부호들이 빼곡했던 시절이 있었지, 지금 우리의 세상은 사탕 불빛들로 가득해.24:00 하늘에는 금방이라도 익사할 듯한 혼미한 의식들 뿐이다. 간혹 명료한 빛을 보더라도 에이, 인공위성이 아닐까. 생각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지
로마서 4:13-25“영점(Zero point)으로부터의 부활” (1) “건너오라” 예수님의 음성이 캄캄한 밤, 호수 위에 들려왔습니다. 한 남자는 망설임 없이 그분의 음성에 의지해서, 배 밖으로 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내딛은 발 밑에는 일렁이는 호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마치 단단한 젤리 위를 걷는 것처럼 물 위를 늠름하게 예수님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밤이 어둡고 캄캄해서 하늘과 호수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런 것은 남자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주위에 있던 제자들은 그 남자를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칭찬했습니다. (2) 며칠 뒤, 황제 가이사만을 숭배하는 도시인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제자들은 대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