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217)
저녁의 꼴라쥬
내가 죽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 내가 죽으려 할 때, 그것은 대속의 십자가를 제껴두고, 내 십자가를 세우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그렇게 해서는 자아가 절대 죽지 않는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약하심이고 하나님의 어리석음이다. 내 죄를 위한 하나님의 적응accommodation이다. 이 적응은, 나를 위해 어리석어 지셨다는 것이다. 나를 위해 약해지셨다는 것이다. 나의 죄를 보지 않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사랑은, 죄를 넘어 그 사람을 본다. 약해지지 않으면 저편으로 넘어갈 수 없다. 어리석어 지지 않으면 저편으로 갈 수 없다. 사랑은 나의 고귀한 신분을 버리고 겸비 상태가 되는 것이다. 나를 비우고 너를 채우는 것이며, 나를 죽이고 너를 살리는 것이다. 도덕적인 노력과 의지 이전에, 이 사..
맑은 소금이 될수록, 그 결정이 순수해지고 순결해질수록, 상한 것들이,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 그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따금씩 한적한 곳으로 가시고 혼자 조용히 기도하던 순간의 그의 감정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는 지쳐 있는 것이다. 모든 상해가는 것들이,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 그에게로 다가와서 그로부터 소금을 얻어가듯이, 그는 상하지 않는 것을 타자에게 주고 자기는 상해간다. 그는 멸하지 않는 빛을 타자에게 주고 자기는 침침해간다. "오직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참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빛을 나누어주셨다. 사람들은 기쁨과 활력을 얻어서 돌아간다. 떡과 고기를 배불리 먹고 돌아간다. 그들은 자기의 필요를 채우고 돌아간다. 등을 돌리는 것이다. ** 예수는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고전 1:8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 될 때, 비난 받을 것이 없는 사람으로 여러분을 마지막까지 견고하게 하실 것입니다. (사역) 거룩은 과정 중에 있지 않다. 거룩은 견고하게 믿음으로 이미 완성되었다. 우리가 할 것은 그것을 믿음으로 붙잡는 것이다. 야고보서가 말하듯, 그것을 믿음으로 (더 정확히는 심정적으로) 붙잡는 것은 일단 거울로 내 거룩을 본 것과 같다. 그러나 그 본 거룩한 나의 모습대로 사는 실천이 없다면, 거룩은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믿는 사람은 믿는대로 행동한다. 믿음은 보이지 않을 뿐이지, 그것이 실재한다. 는 신념을 붙잡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재하는 것들에 대한 싸움이 일어난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다! 라고 주..
유대인에게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신다. 그러나 이방인인 나에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성령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영, 양자의 영을 주심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 이 아람어인 아빠,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방인 조차도 그리스도의 품 깊숙한 안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품 안으로 성령으로 인해 우리가 안겨질 수 있다는 선언이 되어준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 아들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이제 양자는 개인적인 감격에서 머무르지 않고, 더 큰 공동체적인, 너와 그를 모두 초청하는 우리로서 껴안으며 함께 "아버지"를 부르는 더 튼 가족이 된다...
고난을 선택하는 것은 자기 의의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믿음이다. "너희 자신이 믿음 위에 있는가 시험하고" 그는 스스로가 믿음 위에서 선취되어진 완전히 의롭고 거룩한 존재라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의 경향성은 이제 의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현실을 보라. 그렇지 않다! 고 심한 부정과 저항을 그의 몸에 부딪히게 한다. (그의 몸 또한 거센 저항을 한다.) 여기서 그는 모순을 느낀다. 그는 새롭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환경과 몸은 그대로다! 라며 고집을 피운다. 자, 이제 우리는 싸움장에 들어선 것이다. 그것도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다. 영과 육의 대립이 극심하게 일어나는 곳이다. 그곳은 바로 너 자신의 몸이고, 이 사회이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도 자주 개인의 성화를 강조..
자세히 보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고 한다. 정태적인 율법이 아니라 어느 의미에서는 상황윤리가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윤리라는 것이 말 그대로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지 않고 타락한 인간의 자율성autonomy에 핸들이 맡겨지게 될 때나 신율theonomy을 가장한, 또는 타율hetronomy를 가장한 위선적인 자기방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인간은 뼈 속까지 답이 없다. 물과 피와 성령의 증언으로 그를 바닥에서 건져올릴 때 조차, 인간에게는 힘이 없다. 그럼 그를 구해주고 난 뒤에 그에게 스스로를 죄와 악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여전히 인간은 무력함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중간계..
"불편함을 이기는 것은 순종이다" 김병년 목사님의 글을 읽으며 신혼여행 때가 떠올랐다. 신혼여행을 준비하던 당시 나에게 권면을 해주는 선배 목사님들은 거의 대부분 주일을 한 주 빠지고 신혼여행을 가는 것이 좋다고 말씀해주셨었다. 그러나 교회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나는 계속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불편함을 감수하는 순종"에 대한 마음을 주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생각해보면 오히려 순종은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평과 불만이 있을 때에는 절대로 그 불편함disadvantage를 이기지 못한다. 더 외롭고 힘들다. 그러나 그것을 순종과 감사로 화답할 때 우리 삶에는 더없이 놀라운 진보advance가 있음을 보게 된다. 최근 들어 육..
편두통이 왔다. 이런저런 일들을 욕심을 내면서 했는데, 그게 탐욕이었던 것을 모르고 (아니 스스로를 속였을거다) 무리하게 행했던 것 같다. 기세가 등등한 사울처럼 내 힘으로, 내 의지로 이것을 또 저것을, 온 도시와 곳곳을 다니면서 강행하였던 것이 화근이었다. 아프고 나니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내 힘이 아니다. 내 능이 아니다. 란 것을 다시 깨닫는다. 건강관리. 그 능력의 범주 안에서 살아야겠다. 아픈 이는 의존적이게 된다. 오는 길에 국진이 차를 타고 병원에 왔다. 의사의 하는 처방에 철저히 의존적이다. 치료를 받고 약을 먹은 후 바로 집에 왔다. 책을 읽을 때마다 편두통이 온다. 책을 덮고 잠이 들었다. 빛이시고, 음성이신 예수를 만난 이후로 사울은 눈이 먼다. 그 이후로..
어렸을 때 나는 엄한 선생님을 더욱 존경하곤 했다. 물론 체벌은 아팠고 싫었지만, 나를 바르게 교정해주시는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뭘 알겠냐만은, 적어도 선생님에게 맞는 매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던 듯 하다. 나는 하나님의 부드러운 사랑에도 감격하지만, 하나님의 엄한 징계에도 감사하다. 왜냐면, 나를 엄히 대하는 이유는 자신의 친아들이기 때문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징계하시고,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 (히브리서 12:6 새번역) 또, 징계를 받는 것은 그 뿐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신뢰와 같은 어떤 것을 느낄 수 있다. 징계할 수 있다는 것은 신뢰하는 것이다. 이 징계로 ..
하나님은 언제나 이름을 먼저 부르시며 대화를 시작하신다. 나는 식물의 이름들을 많이 아는 사람을 동경해왔다. 박식하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그는 개별자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있어서이다. 해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나도 사랑해야 겠다. (그때 그는 생에 대한 상향성을 얻는다) 관심이 없이는, 이름을 부를 수 없다. 성령의 충만은, 생에 대한 관심이요, 약자와 그릇된 자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 견책을 가지게 한다. 아담의 직업이 이름을 짓고 부르는 자였다는 것은 그렇게 생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되게 하신 것이 선/악의 나뉘어짐과 강/약의 나누어짐으로, 남/녀의 나누어짐으로 분열되고 인간/신의 분리와 단절을 경험하게 된다. 아담이 자신의 한 몸을 손가락질하며 "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