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217)
저녁의 꼴라쥬
두려움이 먼저 사라져야 한다. 이 두려움은 율법에서 온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를 질식시키고 모든 아름다운 가능성도 함께 박탈시킨다.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두려움을 피해 숨으려 한다. 그러나 의지만으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으며 오히려 로마서 7장의 말씀처럼 죄 아래 팔리는 것을 본다. 무엇이 죄인지를 알게 되면 더더욱 그 죄를 피하면서도 그 죄 아래 팔리게 되는 모순의 존재가 인간이다. 로마서 8장의 대전환처럼 우리에게는 힘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항복하는 것이 생명을 향한 열쇠가 되어준다. 항복은 7장까지의 흐름처럼 내가 '어느 정도' 죄인이 아니라 '뼛 속까지 더러운' 죄인이며 그 모든 실행되지 않은 죄가 이미 가능태로서 내 안에 죄다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미 살인이 내 안에..
어제, 재의 수요일을 기점으로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때부턴가 저에게도 사순절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습니다. 사순절, 하면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순종이며 고난입니다. 오늘 성경 로마서 15:8에서 말하듯 예수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셔서 하나님의 약속을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할례의 추종자라는 말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율법에 순종하셨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 율법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율법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를 힘입어서, 우리는 율법에 순종할 수 있는 새 사람을 입게 되었습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면 우리에게는 어떤 긴장의식이 생겨납니다. 고난. 에서 ..
우리는 죄를 이기고 싶어서, 의지를 사용한 나머지 경직이 될 때가 있다. 이때에 사용한 의지는 데이비드 베너가 지적하듯, "사랑을 앞선 의지"이며, 내 마음을 질식시키는 의지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또한 위험의 도랑을 본다. 우리가 갈망이라고 말하는 것이, 제랄드 메이가 말한 것처럼 "정화된" 갈망이 아니라면, 갈망만을 주장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주장이라는 표현을 썼다. 주장한다는 것은, 바울이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서 표현하듯이, "내 뜻대로 되고자 하는 기대"이다. 내 뜻대로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하고, 내 뜻대로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바램은 기대이다. 우리는 기대가 아니라 희망을 가져야 한다. 희망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풀어주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풀어준다. ..
길을 걷다 풋, 웃음이 나온다. 하나님은 참으로 유머러스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숨바꼭질을 즐겨 하신다. 그분 자신이 숨는 것도 즐겨 하시고, 우리가 숨어 있는 것을 찾아 내는 것도 즐겨 하신다. 그는 우리의 삶에 참으로 많은, 다양한 선물들을 주셨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는데도, 두려움과 염려, 방어기제가 그러한 것들을 '받지 않는 안정권'으로 우리를 숨긴다. 나는 그러한 순간들마다 내 영혼에 어스름이 지는 것을 느낀다. 점점 '받지 않고' '주지도 않는' 안정권에 나를 밀어넣을 수록, 내 지각은 매우 협소해진다. 때로는 중간에 낄 때도 있는데, 이야말로 인간이 생각하는 연약한 갈대라는 우스꽝스러운 진리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우리는 받는 것도 아니고, 안 받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중간 지대에..
나는 너무도 혼란스럽다. 내 안에는 두 개의 대립각이 전부 존재한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는 타협할 수 없는 대립각이란 것이 존재한다. 이 사람의 이것은 저사람에게는 타협의 여지없는 치명적인 이론이다. 저사람의 저것은 이사람에게는 너무나 꽉 막힌 갑갑한 이론이다. 그러나 이 둘을 전부 경험해보면서, 위험과 안정 사이를 소용돌이치며 나선형으로 오가면서, 나는 너무나 괴로워 울고 싶은 심정이다. 위험을 감수하라, 그러나 위험은 너를 잃어버리는 파멸로 이끈다. 안정을 추구하라, 그러나 안정은 너를 질식시키고 타자를 배제한다. 위험을 감수하다 나는 어느새, 안정으로 빗장을 걸고 지켜야 할 때를 알게 된다. 안정을 추구하다 나는 어느새, 빗장을 풀고 회오리처럼 풀려 나가야 할 때를 알게 된다. 나는 울고 싶다. ..
십자가는 선택하는 것이다. 넓은 길 가운데서 좁은 길목으로 들어서는 기점을 선택하는 것. 그것은 성별된 고통이다. 그러나 사실 십자가의 길은 초대에 가깝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내 탁자에 놓여있는 부담의 초대장에 가까운 것이다. 나는 편안한 삶을 뒤로 하고 불편한 순례를 따르는 것이다. 십자가는 따르는 것이다. 불편한 제자의 길을 따르는 것. 그러나 온전히 항복하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이 십자가라는 것을 인지하기 전에도, 이미 우리는 십자가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경우도 있지 않는가? 예수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이 십자가는 우리의 길에 있어 제약이 될 것이고 약함이 될 것이다. 약함과 장애, 고통을 거부하지 않고 예수를 따르는 것. '이 땅에서' ..
갈라디아서 5:16-24 성령을 따라 산책하십시오. 여러분은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저는 매우 좋아합니다. 저는 찬양을 들으며 걷는 것을 참 좋아하는데, 찬양을 부르다가 감동이 많이 오면 버스를 타지 않고 집으로 걸어올 때가 자주 있습니다. 물론 세 정거장 거리밖에 되지 않는데요. 오면서 나무들을 보고, 별들을 보고, 사람들을 보고, 또 저희 집 앞에는 중랑천이 있어서 다리를 건너면서 강을 보기도 하고, 조깅하는 사람들을 보고, 바람을 쐬면서 천천히 그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때쯤 되면 집에서 문자가 옵니다. ‘도착할 때가 됐는데 안오고 어디에요?’ 날씨가 추운 겨울임에도, 저는 여전히 산책을 하며 집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특별히 찬양을 즐겁게 하면서 오면, 추운 것도 어느 정도 ..
"성령을 따라 행한다"라는 것이 단순하게 그때그때 즉흥적인 흐름에 맡긴다는 뜻이 된다면 이 또한 반쪽짜리 진리가 된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부인하면서 그 다음 스텝을 어느 방향으로 내딛어야 하는지에 대해 주도면밀해야 함을, 오히려 그 근신과 절제에 대해서 민감한 계획성을 지니고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살기 원한다면 나의 정욕과 탐심은 십자가에 이미 죽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 안에서 우리는 교모하게 획책을 꾀하는데, 이것은 무의식의 선상에서 이루어지며,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예수로 시작하였다가 자꾸만 스스로의 의로 변질되고,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자꾸만 못을 빼고 내려오는 것은 이러한 ..
하나님, 내 영혼이 깊은 어둠 속의 쥐처럼 웅크리고 떨고 있습니다 불안이 몰려오고, 두렵고, 슬프고, 스스로가 약한 갈대임을 봅니다 작은 일 하나에도 요동하고, 1분이 10년처럼 길게 느껴집니다 나라는 존재는 왜 이다지도 허약한 것일까요, 왜 이다지도 여린 것일까요 그러나 사랑하는 주님, 이 밤이 깊어질수록 주님을 향한 제 갈망은 더욱 강렬해집니다 당신을 사랑하려는 제 열망은 더욱 뜨거워집니다 제가 약할수록 저는 당신을 아니, 당신만을 붙들고 놓지 않을 것입니다 자, 어둠이 나를 둘러싸고 내 영혼이 깊은 중에 쥐처럼 찍찍거릴지언정 당신은 나를 놓지 않을 것임을 믿습니다 환난아 오너라, 사망아 오너라, 고독아 오너라, 상실아 오너라 너희는 내가 더욱 주님에게 발버둥치며 달음질하게 할 뿐이다 밤이 되면 사물..
내가 어떤 선함을 행하고 난 뒤에 전에라면 외롭다고 난리를 피웠을 것이다. 왜냐면 내 의지로 내 자아를 죽이려 했으니까. 모든 사람은 위로를 필요로 하고 용납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나도 그러하다. 그러나 입만 벌리고 있어서는 누군가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 결국 내 쪽에서 찾아가고 위로하고 안아줘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쯤에서 자아의 질문이 시작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의지로 이 선하고 의로운 일을 행했다면: 나는 누가 위로할 것인가? 그렇다면 누가 나를 위로할 것인가? 내가 사람들의 연약을 품을 때, 나는 강해야 하는 것인가? 나의 이 연약은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굴 속으로 들어가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여, 사랑하는 나여, 자신의 의지로 자아를 죽이며 이러한 일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