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217)
저녁의 꼴라쥬
우리의 마음은 자연과 같다. 그것은 나름의 체계를 지니고 있고, 또 자유롭다. 그리고 일종의 다스림 (돌봄)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돌봐주어야 한다. 너는 그것을 사랑을 가지고 돌봐야 한다. 머리는 가슴에 대한 청지기와도 같다.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이다. 우리는 때로 그것이 넘쳐날 때에 보살피기도 하지만, 제어하기도 해야 한다. 그것의 종이 되어서는 안되지만, 그것을 섬겨주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기억하라. 여전히 보살피는 동시에 다스리는 것이 청지기의 본분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다스리는 것이 보살핌을 앞서지 않으며 보살피는 것이 다스리는 것을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어떤 스위치 전환의 기점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낮과 밤의 기능과 역할이 다르듯이, 네 시즌의 역할이 다르고 계속해서 ..
새 사람은 오늘의 사람이다. 그는 어제와의 단절을 느끼는 사람으로서 오늘에 속한 사람이다. 그는 자아의 경향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물가에 뿌리를 내리고 오늘도 그 말씀으로 인해 새로운 경향으로의 촉발을 받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날마다 새롭다. 그는 오늘 전혀 다른 새로움 가운데 살아있게 된다. 옛 사람은 어제의 사람이며 과거형의 사람이다. 자아의 경향으로서 그 사람은 아래로, 자아 중심적으로 수렴되어지는 사람이다. 생명의 영과 사망의 육을 말할 때, 단순히 우리는 육체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한계성과 하늘의 무한성을 고려하여 유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느끼는 모든 상황과 긍정하는 사고체계와 긴장관계에 놓여있는 새로운 상황, 새로운 ..
참 자유는 내가 그것을 붙들고 고집하지 않을 때 주어집니다. 내가 집착하는 순간 나는 자유가 아니라 구속을 체험합니다. 중독된 의존성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그 중독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영혼도 참된 자유를 원하지만 우리는 영혼은 곧 육신입니다. 육신은 여전히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묵상해보았습니다. 회개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죄를 이길 수 없고 도리어 죄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인간임을 자복하는 것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위로부터의 전적인 구원의 은혜가 우리의 일상에서 매일매일 필요한 죄인들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죄에 대한 중독의 의존성에서 하나님에 대한 자유의 의존성으로 돌이키게 해달..
바르트의 말대로, "사도직", "사자"는 우리의 정체성의 지평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정체성으로서 우리에게 부여된다. 우리의 내면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가 있다. 이 두가지 전혀 다른 정체성이 부딪혀 레슬링을 하고 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는 먼저 우리가 자유함을 입었다고 선포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죄책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그러나 해방에는, 다시 죄에 대한 방탕으로 빠질 수 있는 도랑의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해방 직후에 우리는 인도함을 받을 푯대가 필요한데, 이 푯대는 고정적이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이미 율법이 우리를 온전케 하는 데에 실패한 것을 통해 우리가 본 바 있다) 그러므로 이 인도의 푯대는, 율법과 같이 고정된 일차원적인 한 점으로서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타고 함..
어느 순간 자신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이유라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때가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선한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유는 내가 악하기 때문이라는 것까지 깨닫게 된다면 그는 이제 정직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대면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전에는 걷지 않았을, 수없이도 등을 돌리던 그 험난한 준령이 다시 눈 앞에 펼쳐짐을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넘어져 있을 때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일어설 수록 선명한 전망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알게 된다. 참으로 정직한 사람들만이 이 좁고 험한 길을 울면서, 울면서, 눈물로 씨를 뿌리고, 상하고, 깨지고, 구르면서 먼저 걸어가고 있었으며, 스스로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처럼 뒤에 남..
거대한 역사 흐름 안의 카이로스와 능력장이 있는가 하면, 개개인이 바이오리듬을 가지고 사는 것처럼 개별자로서의 개인의 삶의 주기에도 카이로스와 능력장이 주어지는 것은 아닐까? 확실히 지금은 은혜의 때이며, 자유의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다. 이 자유를 가지고 방종으로 내달리는 해프닝 또한 숱하게 벌어지고 있으나, 우리는 더 나은 성숙을 분명히 원하고 있고, 균형을 원한다. 그리고 이 균형에 대한 갈망은 자유에 대한 갈망만큼이나 큰데, 그것은 인간이 무한한 영혼과 유한한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이며, 고체와 같은 육신 안에 항상 활동하는 활력으로서의 액체들이 끊임없이 생동하며 흐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형태 안에 생동감이 담겨지는 것이 이 우주이다. 어떤 에너지이든, 그것은 질료를 통해서 운동이 현상으로서 나타..
그래서 언제나 "사람으로부터의" 분별은 완벽한 것을 지향한다고 말하기 보다는 건강한 것을 지향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잠언은 "지혜는 정직한 길로 다닌다"고 말한다. 정직함이 없는 분별은 "속이는 저울추"처럼 지혜는 있으나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되어 미혹의 병기로 악용되어질 것이다. 물론 정직함 또한 지혜가 없다면 "죽이는 순수"가 되어지겠지만. 그러나 나는 정직을 여전히 우선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장과 성숙을 인간은 부단히 꾀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도상 위에 있는 미완의 존재로서 인간은 분별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가질 수 없다. 차라리 한 발을 뒤로 빼고 정직에서의 건강함을 지향하는 것이 안전하다. 그럼에도, 이 시대는 갖은 모호함과 흐릿함으로 더 깊은 분별을 요하고 있으며,..
1. 우리는 그의 일을 제한할 수 없다 2. 양극성 사이에서 우리는 좌우를 로프반동해간다 2.1. 흐름이라고 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흐름을 향한 코너를 돌 때 우리는 중요한 보석 하나를 놓고 올 수 밖에 없었음을 기억하라, 그것은 다음의 사조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새로운 것은 교정으로서가 아니라 반발로서의 반대극에서 창출되어지는 숙명에 놓여있다 이 세계는 다른 색의 두 물감이 번갈아가며 빛의 조명을 받으며 이루어지고 있다 2.2. 흐름이라고 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 눈을 뜨고 반대편을 보는 시력을 잃지 말기를, 심해에서 시력이 퇴화된 물고기처럼 방심하지 말기를, 때로는 연어처럼 저항하고, 항쟁하고, 소리치고, 튀어올라야 할 필요가 있었음을, 왜 그러한 생명력은 항상 소수에..
계 3:14-22 문 앞에 오신 예수님 지난 주일 새벽에 저는 특이한 것을 보았습니다. 아니, 특이하다고 하기보단 슬픈 것을 보았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보통 주일 6시 30분에서 7시 사이에 강남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이날은 조금 더 일찍 왔습니다. 6시에 강남대로에 도착했는데 너무 많은 젊은 청년들이 강남대로에 있었습니다. 이 새벽에 사람이 이렇게 많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들은 다 취해 있었습니다. 취해서 집에 가려고 모두 버스와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저는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었고, 그들은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 사람들은 오늘의 사람들이 아니라 어제의 사람들이 아닐까. 어제로부터 흘러들어와서 해가 뜨기 전에..
어수룩하지만 진중한 것이 좋다. 내가 말하는 어수룩함은 준비되지 않은 모습이 아니다. 준비가 된 뒤에는, 경직된 완벽주의를 버리라는 것이다. 다윗처럼 어수룩하게, 하던 대로, 가장 잘 하는 것으로, 가장 잘 맞는 옷을 입고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톰은 노래를 부를 때, 삑사리를 내는 때가 간혹 있었다. 운지가 잘못 되어 현에서 탁한 소리가 나는 때도 있었지만 그는 그대로 갔다. 그런데 나는 왠지 그것이 참 좋았다. 어수룩해서 좋았다기 보다는, 그 어수룩함 속에서만 번뜩이는 영감의 종류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말끔한 완벽성을 그래도 원한다면, 나는 말하고 싶다. 만약 그대가, 어수룩함 속의 소중한 것들을 포기해도 괜찮다면, 가장 중요한 가치 하나를 잃어도 괜찮다면, 그렇게 하라.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