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217)
저녁의 꼴라쥬
가장 온전하게 설 수록 가장 자유하다. 온전히 설 수록 더 많은 숨통이 트인다. 그리고 이것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이다. 그러므로 엎어져 있는 이들에게 우리는 여전히 강압의 명령이 아니라 청유형으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온전히 서자. 그러나 타자에게는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떨까? 더 좋지 않을까?'라고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참된 견책은 "성령으로만" 하나님의 때에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자신의 죄로 인해 산산조각이 나고, 나 또한 그 죄의 파편을 뒤집어 쓰게 된다. 이것은 죽이는 문자, 정죄의 원리이다. 내가 깨끗하다 생각하고 남을 비판하는 순간, 율법은 다시 나를 정죄한다. 내 눈에서 들보를 뺄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 후에 "밝히 볼 때만이" 우리는 충성된 친구..
나는 사실 노래에 있어서 표정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개념이 전무했던 사람이다. 톰 요크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할 때마다 양쪽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흐느끼는 것이 정서표현에 있어 굉장한 진정성이 있다는 것을 그의 라이브를 보면서 비로소 숙고해보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에 찬양인도를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항상 활짝 웃는 얼굴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지인이었던 성악 출신 자매가 예배가 끝나고 "표정은 발성에 있어서 굉장한 도움이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의 활짝 웃는 얼굴은 기쁨을 표현하고, 큰 소리와 열린 음을 내기에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표정이 발성의 확성기 역할을 해주는 것이리라. 나는 톰 요크의 표정이 이를테면 온갖 비애와 멜랑꼴리함, 냉소와 비판의 믹스츄어에 대한 훌륭한 증폭기 역할을 ..
때로는 비둘기와 같은 순결함이 타자에게 폭력과 배제가 된다. 때로는 뱀과 같은 지혜가 스스로를 기만하고 타자도 기만하는 파멸이 된다. 때로는 그 둘을 잘 배합하고 변증적으로 잘 순환하며 실천하고 있다고 스스로 굳게 "순수하게" 믿지만 자기도 모르게 어그러진 길로 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다윗 왕에게는 나단과 갓, 사울에게는 사무엘이 있어서 그가 어그러질 때 그를 견책해주었다. 스스로가 한계가 있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모를 때, 인간은 초극을 향해 달리기만 한다. 그리고 어느덧 자신이 제일 무지하고 어리석음의 도랑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차라투스트라가 빠진 오류라고 나는 생각한다.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뒤로 물러나라.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성령이 다른..
참된 충성에는 경직이 없다. 이 충성의 근원은 자유이다. 성령은 나를 자유롭게 하셨다. 이 자유에서 충성할 수 있는 자유로 신자는 나아간다. 이 충성은 내부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외부에서 강요하는 충성은 억압이고 폭력이다. 그러나 이 충성은 내부에서부터 나를 도우시는 성령의 열매이다. 이 충성은 전적 타자로서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공의를 연약한 죄인이 실천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의 내부로부터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의지를 임재를 통해 움직여가신다. 이때의 움직임은 여전히 강요가 아니라 요청이며 먼 곳으로부터의 손짓이 아니라 함께 동행하는 맞잡은 손이다. 그렇게 우리는 한걸음씩 우리가 속해있던 미궁을 빠져나온다. 우리는 광야를 벗어나는 중이다. 하나님이 광야로 인도하고 있다면 그것은 광야가..
그러므로 두가지 자유가 존재한다. 하나는 정말 모든 것에 대한 자유, 성령은 이 억압에 대한 해방에서부터 역사한다. 이 자유에 놓여질때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있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제 질문한다: 무엇이 나에게 방향성을 제공하는가? 나는 이 자율성을 가지고 어떤 선한 방향을 가져야 하는가? 그의 질문은 자의성이라기 보다는 의문이다. 그는 말씀 안에서만 그 대답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성령이 그를 자유케 하시고, 생명을 회복시키신 후에, 인도해간다는 것이다. 그를 데리고 가신다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된다. 여기서 그는 다시 질문한다: 아아, 그러나 나는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다. 의지도 없다. 여기에서 그는 불가능을 가능케 할 접점을 오직 성령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 말씀 안에서 대답은..
성령에 매인 사람이 오히려 가장 자유롭다. 그리고 그는 자의적으로 어떤 것을 행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와의 교제 속에서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여 그대로 행한다. 성령에 매여 광야로 간 예수는 자신의 필요를 보지 않았다. 떡도, 권세도, 안전도. 예수는 오직 성령에 매여 순종했고, 자신의 유익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시는 대로만 행했다. 가라 할 때 가고 멈추라 할 때 멈추었다. 바울도 그러했다. 계속되는 고난에 모든 이들은 그를 만류하였으나 그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갔다. 고난이 있을 것을 알고도 갔다. 성령에 매인 사람은 바람과 같다. 자신의 뜻대로 머물거나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야말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리고 가장 충성된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러나 성령의 사..
자유와 원칙의 변증법은 계속해서 순환할 것이다. 지구 저편에서는 계속해서 자유의 소리가 외쳐질 것이고, 해방에 대한 기쁨으로, 참된 (나는 이것은 예술가적인 자유라고 말하는 것 이외의 가장 좋은 표현을 찾지 못했다) 자유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여전히 그 자유로 생겨난 부스럼들과 허물들에 대한 비판의식이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자유에 대해서는 원칙이 따라가야 한다. 방향타가 없는 자유는 없다. 올바른 방향타가 있는 자유는 놀랍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참되고 완벽한, 창조적인 자유이다. 우리는 이 자유를 누리되,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 누려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마음을 성령을 통해 열매맺고 있음을 확신하자. 억누르..
그러니까 성화는 결국 성도를 자유 가운데로 이끈다. 이 성화의 여정 중에 혹시 자기 성화나 자기 경건에서 오는 긴장의식을 느끼고 있다면 오히려 내려놓는 것이 좋다. 긴장하고 있다면 그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며 아직 성령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상이나 벌 때문에 성화"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중 은혜의 하나로써 한없는 사랑 가운데서 견인되어지고 성화"되어지는" 것이다. 내가 피동적인 것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구원이나 거룩에 대해 전적으로 무력한 출발선상에 있었으며, 하나님에 대하여 접붙여져야 시작할 수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창조되어진 순간부터 피동적이며, 구원에 있어서도 그러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잠잠히 서 있어야 한다. 그러..
"내니 두려워 말아라"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낯설었다. 그는 더 순결해지고, 더 빛으로 가득했다. 제자들은 그를 영체로 보았을 수도 있다. 제자들은 여전히 자기 위치에 있었고, 죽음을 이긴 예수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었다. 삼일만에 만난 예수는 삼천년이 지난 것처럼 전혀 다른 차원으로 극복된 예수같았다. 제자들에게 있어 예수는 너무도 낯선 승귀된 모습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내니 두려워 말아라, 안심해라"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예수는 분명 새로워졌다. 그에게는 어떠한 일련의 극복의 과정이 분명 있었고, 제자들에게는 이것이 "낯설음"으로 느껴졌고, 낯설기에 두려움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는 그들과 지평을 함께 하기를 자처한다. 예수의 사랑은 신실했..
베드로야, 네가 나를 이 물고기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너는 내가 너에게 베풀어준 복을 넘어서 나에게 나아와 나를 만나길 원하느냐? 너는 나를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나를 찾지 못하자, 너는 물고기를 찾기 시작했다. 무언가 다른 것으로 너의 안을 채울 것을 너는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너의 배를, 너의 욕구를, 너의 소망을 잠시만 채울 것이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목이 타는 것처럼 너는 마셔도 마셔도 갈증을 느낄 따름이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잡아준 수많은 물고기를 옆에 두고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나는 너를 탓하지 않는다. 배고파서 나를 찾은 사람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물고기를 내가 주었던 것처럼, 너의 배고픔에도 나는 물고기로 너를 먹이기 원한다. 나의 최종적 목표는 너와 나의 교제이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