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217)
저녁의 꼴라쥬
사랑이라는 인격범주는 자기 존재 안에서 차이성과 통일성을 연결한다. 개인적 제한성에 묶이지 않은 고유한 인격 개념. 1. 우리로서 표현되는 하나님의 독특한 인격구조 단일성과 복수상을 넘는, 고전적인 실체의 깨뜨림.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구조이다. 2. 사랑으로 표현되는 상호소통적 인격개념. 계시자와 계시된 자의 통일성. 하나님 사랑은 아들, 성육신하신 말씀 속에서 신체적으로 나타났다. '상호소통적인 우리'의 통일성. 성령은 나가는 자, 의사소통하는 자이다. 3. 세 위격 사이에서 야기되는 사랑의 교제는 에로스가 아니다. 긴장되고 대극적인 교제가 아니다. 타자로부터의 존재, 타자를 향한 존재. 하나님의 존재는 자기주심이다. Gottes Sein ist Selbsthingabe. 그리스도의 자아는 아리스토..
방학 중에 나는 'Slow down'하는 법을 자꾸 하나님께 배우는 것 같다.빠르게 일처리를 해내려고 할 때마다, 하나님은 내 손을 붙드시고 그럴 때마다 내 발이 안전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여주신다.그래서 요즘에는 삶에서 보여주시는 작은 제동장치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소로우의 책을 방학 동안 읽고 있다. 소로우는 '여백의 페이지'가 없는 삶은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분명 날마다 숲에서 들리는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노동을 했을 것이다.'너무 바쁜 것'과 '성실한 것'은 구분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그의 책을 보면서 느끼게 된다. '실시간'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다보면 매우 민첩하게, 기민하게, 급속하게, 재치있게, 효율적으로 하는 것이 승리에 있어 매우 중요한 키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며칠 전에 오랫만에 "슬램덩크"를 보는데, 정대만이 매우 지친 상태에서 계속해서 3점 슛을 날리는 장면이 있었다. 모두가 어리둥절할 때,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정대만이 계속해서 3점슛을 마음놓고 날릴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실패했을 때 팀원들이 책임져 줄 것을 (리바운드를 포함해서)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놓고 그는 3점 슛을 날릴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팀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고 있다."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이 아닌가.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오히려 나의 백퍼센트를 쏟아부을 수 있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3점 슛을 과감하게 날릴 수 있는 것. 개인이 공동체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는 동시에 어린아이처럼 전적으로 자유롭게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어떠한 유혹의 상황에 놓여질때, 우리는 문득 선악의 피안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내가 그 안에 거하던 참됨과 정당성 안이 아니라, 참으로 '모든 것에 대한' 자유에 놓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음을 문득 깨닫는다. 너는 진공 속에 있다. 그리고 악을 선택할 때, 다시 깨닫게 된다. 너는 너무도 쉽게 타버리는 갈대였다. 너는 너 자체로서 존재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너는 너 자체로서 너의 생을 견인할 만한 에너지를 한 톨도 네 안에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것을 네 밖에서 네 안으로 가져올 권리도 '네가 독자적으로 존재할 때에는' 없다. 그리고 문득 너가 디디고 있던 발판이 사라지고 진공의 한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된다. 너무도 연약한 허무 ..
이삭은 자기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아내가 아이를 가지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였다. 주님께서 이삭의 기도를 들어 주시니,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게 되었다. (창세기 25:2, 새번역)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야곱과 에서를 이미 계획해두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없었다. 이삭은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계획이 있음에도 계속해서 우리는 구해야 한다. 구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매순간 하나님의 뜻의 결대로 순종하며 걸어야 한다. 그럼 나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계획을 막는 것인가? 궁극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다른 이들을 통해 하나님은 또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내가 그 계획에 동참하지 못하는 것 뿐이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 고침을 받다(마 8:5-13; 눅 7:1-10)] 43 이틀 뒤에 예수께서는 거기를 떠나서 갈릴리로 가셨다. 44 (예수께서 친히 밝히시기를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 하셨다.) 45 예수께서 갈릴리에 도착하시니,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를 환영하였다. 그들도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께서 거기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46 예수께서 또다시 갈릴리 가나로 가셨다. 그 곳은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다. 거기에 왕의 신하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앓고 있었다. 47 그 사람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나와 갈릴리로 들어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께 와서 "제발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셔서, 아들을 고쳐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
날마다 마음의 할례를 행하는 것. 그것은 스스로의 욕망과 욕구대로 사는 것을 찢는 것이고 도려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하필 생식기의 포피를 자르게 하시는가? 우리 욕구의 가장 강렬한 한 부분을 왜 그분은 잘라내시는가? 나의 욕구와 하나님의 뜻이 그만큼 반대방향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 아닐까? 그러므로, 날마다 스스로의 마음의 포피를 벗기고, 찢고, 잘라내는 고통이 없다면 그는 이미 훈련병에서 이탈한 사람일 것이다. 하기 싫은 것, 성가신 것, 부담되는 것, 어려운 것을 피하기만 한다면 그는 이미 탈영병의 신분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모두가 훈련을 받기 위해 그 섬에서 떠나고 있는데 나 혼자 그 섬으로 여객기를 타고 편하게 관광을 가려는 것이라면 나는 이미 소명을 버린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날마다 죽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