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오랑쥬 껍질 씹기 (170)
저녁의 꼴라쥬
1 오늘은 알렉스 얘기를 하려고 한다. 알렉스는, 암스테르담 동쪽 근교 (두 정거장 떨어진 비교적 변두리)에 위치한 Kadijksplein (plein이 붙으면 광장이라는 말이 된다. Museumplein은 미술관 광장, Rembrandtplein은 렘브란트 광장인데, Kadijksplein의 면적을 보면 아, 네덜란드 사람들은 약간만 공터가 있어도 plein을 붙이는구나 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에서 만난 베트남계 네덜란드인이었다. 부모는 베트남의 수도승의 가문이며 자신은 장남이라, 그곳에 돌아가면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수도승(monk라고 했다)이 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지금도 그러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알렉스는 매우 착한 친구였다. Kadijksplein은 다름아닌 내가 머무는 베이..
일본 문화에서 재미있는 것은 '아리가토'라고 해야 할 상황에서 종종 '스미마셍'이라고 한다는 것. 그것은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의 극단적 표현이다. 하지만 이렇게 극단적으로 예의바른 일본인들이 '혼자서는 빨간 불에 횡단보도를 못 건너도 집단으로는 건넌다.'고 자조한다. 혼자서 옷을 벗는 것은 창피해도, 목욕탕에서 집단으로 벗는 것은 창피하지 않은 법. 이는 법규를 지키는 문화조차 수치심 위에 세워져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이를 '연대 책임은 무책임'이라 표현한다. 이는 똑같은 현상에 대한 군사주의적 표현이다. 신의 눈길은 인간에게 죄책감을 안겨주고, 인간들의 눈길은 사람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해준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주체 형성이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자기반성의 능력을 갖춘 '개인'..
요스트는 밥을 먹으러 가자면서 나를 암스테르담 시립 도서관으로 끌고갔다. 우리는 예배를 마치고 방금 교회에서 나왔다. 이 교회는 지하실을 리모델링해서 카페 테이블과 서재, 빔프로젝트와 악기 앰프등을 총명하게 배치하여 깔끔한 교회로 탈바꿈한 장소였다. 이 곳에서는 자주 콘서트도 이루어지곤 했는데 내가 갔던 주에도 멀리 미국에서 온 CCM가수 (중년의 금발 여인)의 공연이 있었다. 라트비아에서 날아온 나의 친구들 Man-hu도 이곳에서 얼마전 공연을 했다고 한다. 요스트는 네덜란드인이지만 영어가 주언어인 이 인터내셔널 처치를 다니고 있었다. 예배가 끝난 후에 우리는 운하와 어지러운 거리를 지나 트램의 정거장들이 모여있는 중앙역Centraal Station 뒤로 흐르는 커다란 강Het Ij가에 세워진 Bibl..
어제는 교회 지체들과 함께 절친의 birthday party를 하면서 8명이서 마피아 게임을 했다. 경찰 1, 의사 1, 마피아 2, 시민 4. 나는 마피아였다. 초반부터 나의 연인이 내 표정을 직관적으로 읽고는 내가 마피아의 표정을 하고 있다며 몰아세우기 시작한다. 나는 마피아이긴 하지만 예, 정직하게 제가 마피아가 맞았습니다. 절 보내세요. 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히려 내 연인의 직관을 의심토록 하기 위해 타인들에게, 그리고 그녀에게 온갖 수법과 화술 (아마 수사법까지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을 동원하여 그녀의 직관의 뿌리에 의심의 토양을 형성시켜 스스로 흔들리게 만들어야 한다. 실로 사단이 우리를 속일 때 쓰는 전략이다. 이러한 이유로 마피아 게임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전략은 적을 제압..
마치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에서 카프카가 발견한 시고쿠 시골의 깔끔한 도서관처럼, 나는 이 포천의 한 변두리에서 깔끔하고 훌륭한 시설의 도서관을 찾아내었다. 이곳은 적잖은 양서에 책을 읽거나 무선 인터넷을 할 수 있는 공간에 헬스클럽과 샤워장까지 갖춘 곳으로, 지방 도시의 문화시설을 위한 노력을 적잖이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공부로 인해 몸이 뻐근하고 피곤하면 이 헬스장에 가는데, 부위별로 근력을 강화하는 기구에 앉아 운동을 한다. 오늘은 단추가 떨어진 반바지를 가져간 바람에 윗몸일으키기 하나를 빠뜨리고 운동을 했는데 운동이 끝나고 나서 어쩐지 배부분에만 강화되지 못한 허술한 공백같은 것이 느껴졌던 것이었다. 음, 몸의 각 부분part를 골고루 운동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 거구나. 성경에도 전신갑주를 입..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말은 여호와께 주권을 인정하며 맡기고 결과를 순복하겠다는 삶의 자세이다. 이 한쪽 편의 신앙_ '내려놓음'에 치중한 나머지 지나치게 되면 쉬운 신앙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결과에 대한 집착이 없어지는 것은 좋은데, 관심이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오히려 회의론자 내지는 염세주의자가 되게 할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노력이 아닌 은혜로 하는 것에 있어서, 그것이 '전적인 은혜'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전적인 은혜라는 것이 전적인 포기, 아니, '전적인 널부러짐'은 아니지 않은가. 언젠가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은혜에 발 맞추어 가기 위한 '페달 돌리기'에 게을리 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모든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은 하나님이지만 하나님..
몇 주전에 향방 작계 훈련을 받았는데 또 동미참 훈련이 나왔다. 귀국하고 서울에 온 다음 날에 집 대문을 두드리며 동대 행정계원이 "선배님, 훈련 꼭 나오셔야 합니다" 라며 통지서를 주고 갔다. 해외에 나갔다가 한국에 다시 돌아오며 느낀 점 두가지는, 서울은 엄청나게 발달된 괴물스러운 첨단의 도시 (교통, 전자 면에서 특히) 라는 것과 우리는 아직 "휴전 중"일 뿐인 분단 국가라는 것이다. 외국에서 LG와 SAMSUNG등의 선전을 보고, 우리 나라 반도체 산업이 정말 최강이라는 것과 건재한 HYUNDAI 차를 보고 '아, 우리나라는 정말 대단한 나라였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정말이지, 유럽에서는 한국이나 일본 등을 제외하면 어떤 아시아 국가의 브랜드도 찾기가 힘들었다. 노트북이나 몇몇 전자 제품은 일..
방문을 닫고 나면 정말 혼자인 듯하다. 그리고 더욱 내면화되어지기 쉽다. 외부의 문이 닫히고 비로소 나의 내부에 시선을 돌렸기 때문이다. 릴케였던가. 눈은 외부의 창이다. 그래서 눈을 감으면 내부의 창이열리게 되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게 된다고. 이곳 암스테르담에서 나는 버지니아 울프가 모든 여성 작가에게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남성 작가는 당시 모두 가지고 있었던) "자기만의 방" 을 소유하게 되었다. 정확히 묵상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조용히 창 밖을 보며 음악을 듣거나, 글을 쓰거나 창문 틀에 앉아 기타를 치기에 적당한 크기의 방이다. 네덜란드 집의 창문은 매우 넓다. 창문을 열면 내가 집 안에 있다기 보다는 외부로부터 단지 창 하나를 두고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그래서 들게 된다. 외부로부터 단절감..
그릇, 이라고 나는 발음했다 그릇에 음식이 담겨지듯 종이에 텍스트가 담겨 있다고 누구도 그릇 가장자리까지 음식을 꾹꾹 담지는 않는 것처럼 (있다면 드물게), 텍스트도 적당한 분량으로 여백을 남기며 책에 담겨져야 한다. 행간 이 없다면 텍스트는 독자를 압박하게 될 것이고 독자의 시선은 그가 머물 행간의 없음에 강압적으로 재촉당하게 된다. 그리고 만약에 그가 텍스트 바깥으로 시선을 조금이라도 헛디디게 된다면 그는 곧 책 바깥으로 추락해버릴 것이다. 이렇게 독자를 압박하는 책으로는 교과서와 문제집 류가 있다. 행간이 넓을 수록 독자는 그 여유공간에 코를 집어넣고 기꺼이 텍스트를 들이쉬고_inhale 내쉴_exhale 것이다. 들이쉬고 내쉰다는 것은 책과 독자가 교감_ corresponde한다는 것이다. (독자..
아이의 울음과 어른의 울음은 주파수가 다르다. 어른들은 아이의 울음에 대해 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지하철 안이었다. 아이가 통곡을 했지만 신경을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아이는 자신의 성대가 더 발육하여야 호소력이 생긴다는 점을 배워야 할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울음은 어떤 호소력이 있을까. 지하철 안에서 아이에게 주파수를 맞춰주지 않던 사람들은 아이의 울음에 반응하지 못했다. (그의 부모를 제외하고) 우리는 아버지의 울음에 주파수를 맞추고 있는가. 일단 주파수를 맞추고 나면, 그것이 세상의 어떤 성대도 흉내내지 못할 엄청난 호소력으로 울부짖고 있다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