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오랑쥬 껍질 씹기 (170)
저녁의 꼴라쥬
키예프였다. 마리앤을 만난 것은. 마리앤은 강가를 보며 작은 나무의자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대화 상대를 들뜬 얼굴로 마주하고 있었다. 마리앤만큼은 건너편의 조용한 풍광을 보며 무언가를 수첩에 적고 있었다. 나는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고양이처럼 무언가를 끄적이기만 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옆에 서서 강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을 즐겁게 보내고 있니?' 마리앤이 말을 건넸다. 딱히 말을 걸려고 그 옆에 서 있던 것은 아니였다. 그저, 그녀로 하여금 잠든 사람의 머리칼처럼 의식을 조용하게 만드는 풍광은 어떤 것일까, 궁금했던 것이다. 어쨋든 그녀는 저 강가에서 주는 생각을 가지고 수첩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고, 나는 그녀가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강 건너에서 ..
교토에 갔던 일이 생각이 난다. 조용함과 한적함을 찌는 듯한 여름 중에 찾아 저가항공을 잡아타고 간사이 공항으로 향했다. 교토에서는 지인이 마중을 나오기로 했었지만, 일정보다 먼저 교토 역에 도착해버렸다. 무더운 한여름의 교토 중앙역 광장은 부산했으며 나는 이전에 가졌던 인상의 여정을 찾아 헐떡였으나 발견되어지지 않았다. 일행을 만나 버스를 타고 이동 중에도 나는 그 인상의 루트를 차창 밖으로 기를 쓰고 찾고 있었고 어디서도 추억은 발견되어지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나는 지금 라멘 집에 앉아 있다. 이 집이 맘에 드는 것은 블랙과 레드 컬러의 강렬한 일본적 대비와 더불어 쿨 재즈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고, 물 컵이 플라스틱이 아닌 유려한 글라스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강렬한 정갈함, 그것이 내가 교토에서 ..
중학교, 고등학교와 대학교 재학 시절 때 나에게 유일한 스트레스의 탈출구는 노래방이었다. 당시는 노래방에 청소년이 출입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쟁점이 중첩되던 시기였고, 나는 '단지 노래방에서 노래만 불렀다는 이유'로 경찰서에서 순박한 친구들과 함께 진술서를 쓴 적도 한번 있다. 우리의 스트레스는 실로 엄청난 것이어서, 일주일에 한번 가는 노래방은 그야말로 고함과 비명의 락뮤직과 멜랑꼴리한 소년적 감성의 발라드와 게토적 취향의 힙합뮤직의 장르로 중무장되어 있었다. 어느 보이밴드도 이렇게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커버하지는 못했으리라. 셋리스트도 매우 정교하게 짜여져서, 다소 부드러운 소프트락으로 (라디오헤드의 2,3집과 콜드플레이, 킨 등이 여기에 속한다) 매우 달달하고 우울한 감성으로 시작하여 분위기가 고조되..
자아가 타자-특히 멀리에 있는 타자-에게 세계의 나머지 공간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할 온전한 권리를 부여하면서 스스로 자기 영토를 보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상황에서도 충분히 배제가 일어날 수 있다. 경계를 긋고 유지하려면 자기를 주장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대개 그것은 타자의 삶에 대한 위협이라기보다 자기 경계에 대한 위협이며, 따라서 자아의 내적 구조에 대한 위협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아의 건전한 자기 주장이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139-140쪽) 나는 바운더리가 분명한 편이다. 게다가 상당히 고지식한 (고집 센) 면까지 있다. 그런데 내 안에서 정직하게 대면한 모순은, 볼프가 지적하듯이, 스스로의 편의에 의해 자의적으로 재설정하는 바운더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보..
나는 조용하고 작은 우주 속에 있다. 그리스인들은 행성들이 돌면서 아름다운 심포니 소리를 낼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는데, 내 방은 아무 소리도 없다. 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다. 교토의 철학의 길 변두리에 놓여진 작은 게스트하우스에서 8인 도미토리에 혼자 놓여진 일이 있다. 밝지만 작은 방은 어두운 교토의 작은 마을 안에, 작은 지구본 안에 매달려 있었다. (우주는 정말 어두운 걸까? 사실은 빛으로 가득 찬 어떤 곳 안에서 손톱만큼 작은 어둠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주는 깨진 형광등의 수은처럼 반짝이는 빛 말고는 없다. 충일한 빛은, 다른 어딘가에 있다.) 작은 지구본에 매달려 있음을 자각한 나는, 울고 싶었다. 아내를 놔두고 내가 왜 혼자 교토에 온거지? 나는 왜 한학기 힘들게 근로로 고생해서 ..
아이폰을 산 이후 2년 여가 넘게 겪는 다소 우스꽝스런 증후군이 둘 있다. 하나는 실제로 있지 않은 진동을 바지 속에서 느끼는 것과 다른 하나는 문자가 오지 않았는데 액정이 켜진 것처럼 느껴져서 액정을 쳐다보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집중되어 일어나지 않고 파편화된 멀티-태스킹의 분화된 감각으로서 우리의 의식을 분열시킨다. 어쩌면 이 분화된 집중의 에너지가 약한 탓에 착란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지하철의 사람들은 그 작은 스마트폰 안에 몸 전체가 들어갈 듯한 표정과 몸짓을 하고 있는데 이는 집중보다는 권태를 흠뻑 머금은 피로에서 도망치는 현대인의 유일한 수단이 되곤 한다. 나는 오늘 비슷한 경험을 했다. 책상 위에 놓아둔 액정에서 알림이 뜨는 것 같아 핸드폰을 확인해보았다. ..
심야식당 시즌 2를 보면 "가라아게" 편이 있다. 가라아게는 일본 가정식 닭튀김 요리이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인 사카이 마사토 주연의 "남극의 쉐프" 초반부에서도 이 가라아게가 등장한다. 주인공이 남극의 월동대의 요리사로 가기 전에 부인이 만들어준 가라아게에 대해 두 번 튀기지 않으면, 그것도 정확한 온도로, 튀김이 바삭하지 못하고 안의 살코기도 제대로 익지 않아 식중독에 걸릴 위험이 있다고 잔소리를 하다가 핀잔을 듣는 대목이 있다. 실제로 가라아게는, 겉의 튀김은 바삭하고 안의 살코기는 촉촉한 것이 제대로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한국에서 메뉴판에 소위 "가라아게"라고 적힌 것들을 몇번인가 먹어본 일이 있는데, 그야말로 "촉촉함이 없는 치킨"이 아니면 너무 축축해서 "덜 튀겨진 살덩이"의 양극성 ..
요새 독서량이 조금씩 늘어감에 따라 체력에 대한 중요성을 점점 실감하게 된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일이 끝난 아내를 만나 저녁식사를 하고 8시가 되면, 함께 학교로 돌아와 아내는 음악관의 오르간 연습실로 들어가고 나는 도서관으로 돌아가 책을 읽는다. 그러나 이 시간부터 독서량에 비해 습득량은 10%가 채 되지가 않는 것이다. 책상에는 앉아 있으나 다리는 땅 밖으로 돌출된 구근처럼 꼬일대로 꼬이는 것이다. 그야말로 책에 의식을 뿌리내리지 못하였소, 라고 종아리가 외치는 격이다. 뿐만인가, 급기야는 나비처럼 펄럭펄럭 양다리가 날개짓을 하는데 그 모양새가 금방이라도 의자 위를 이륙할 기세다. 실상은 책 속에 조금이라도 침투하려는 수면 속 접영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갖은 노력을 두시간 여 한 뒤에..
나는 대학이란 숲을 반드시 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따금씩 책을 한권 들고 나무의 겨드랑이로 숨어들 때가 있다. 벤치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나의 학교 뒷편에는 사색하며 배회할 만한 산책로가 있다.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듣다가 문득 창 너머로 이 산책로를 바라보는 때가 많다. 그때마다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의 길을 품고 있었던 산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철학의 길"은 교토와 하이델베르크 두 군데에 있다. 교토의 철학의 길은 평지인 반면에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의 길은 거의 능선에 가깝다.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지점까지의 언덕길이 원래의 철학의 길이고, 일본의 것은 나중에 독일의 것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라 한다. 나는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의 길을 등산하듯 올랐던 기억이 있다. 돌아..
9월 25일 저녁, 나는 지금 홍콩 공항에서 transit 대기 중에 있다. 이곳 게이트 앞에서 보딩을 하려고 대기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아니 사실은 그들의 키를 보면서), 홍콩에서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사람들은 대개가 네덜란드인인 듯 하다. 모두 노랗게 창백한 그리고 불그스름한 얼굴을 하고 있고 북극의 타는 태양같은 머리색을 한 이들 사이에 내가 있었다. 귀국하는 사람들. 어떤 의미에서 나는 다시 암스테르담에 돌아가는 사람이다. 어느 장소든, 100일이 넘게 머무른다는 것은 그곳에 적응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민간인과 군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신분이 합의점을 찾는 지점이 100일 휴가이듯 말이다. 최소한의 적응기간의 상징이 100이란 숫자에 있다. 지금껏 내가 100일을 머무른 타국의 도시는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