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오랑쥬 껍질 씹기 (170)
저녁의 꼴라쥬
인간은 무지해서 모든 일의 추이를 끝까지 겪고 나야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지혜, 라고 하는 것은 창조세계가 내재하고 있는, 아니 내재한다기 보다는 수취하고 있는 존재의 근원적인 원리 같은 것이다. 성경은 그 지혜의 근원을 창조주에게서 찾으며, 창조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그 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이 세계를 지으신 이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 만으로도 창조세계의 결과 같은 흐름과 맥락을 읽을 수가 있게 된다. 잠언에서 말하는 어리석은 자는 듣지 않는 자로 묘사되고, 자기의 방식을 고집하는 자로 그려진다. 일주일간 책을 한 자도 안보고 휴식했다. 맡은 설교 사역이 중심추가 되주어서 그나마 흔들흔들, 지냈던 것 같다. 늘 내가 살고 싶은 방식과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
베를린에 다녀왔다. 케냐 피베리를 업어와서 아침에 사람들과 함께 하는데, 분위기가 좋아졌다. 방문하는 로스터리마다 테이스팅을 하느라 6샷 분량을 하루에 삼키곤 새벽 두시에 눈을 떴다. 아무리 걸어도, 아무리 쉬어도 가벼워지지 않을 때가 있다. 다리에 피로감이 가시질 않는다. 너무 많은 것을 축적하면 덜어내라고, 몸이 신호를 보낸다. 여기서 비효율을 두려워하면 강의 하류까지 떠내려가게 된다. 스스로를 다잡고 활동을 단순화시켜야겠다. 해석학 자료를 다 읽었는데, 내키지 않아서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읽기의 지향이 플러스에 기울어 있으면 늘 남는 것이 없다. 시규어 로스는 겨울에 참 잘 어울린다. 요즘은 애플 뮤직에서 다른 사람들이 올린 음악 리스트를 즐겨 듣는다. 선곡이 기준이 저마다 달라서 같은 아티스트..
장애나 문제를 가지고도 감사할 수 있다면 그 삶은 영적인 것이 되기 시작할 것이다. 오전에 리쾨르를 읽고, 도서관 카페테리아에서 식사를 한 후에 잠시 공원 옆으로 난 주택가를 거닐었다. Haus am Horn까지 걷고, 공원 길로 다시 들어와 도서관으로 돌아오니 톰 요크의 앨범을 한 바퀴 다 들었다. 톰 요크는 나로 하여금 환경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한 아티스트인데, 어제 읽은 글에서 나는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인식의 지평을 열어준다는 대목에서, 단순한 아티스트인 톰 요크나 그의 앨범 아트워크를 통해 환경이나 정치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일련의 시간들을 되새겨 보게 되었다. 겨울 바람을 맞으며 한 바퀴를 걷고 나니 친숙했던 것들이 새롭고 낯설게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을 몇 장 찍고, 다시 따뜻한 ..
지지난 주부터 폴 리쾨르 해석학 수업에 들어가고 있다. 프랑스 학자에게 리쾨르를 배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의미심장하다. 박사과정 세미나와 겹쳐서 엄두를 못 내다가, 세미나가 끝나는 날 바로 교수에게 메일을 보내고, 흔쾌히 환영하는 답장을 받고는, 매시간 리쾨르의 텍스트를 읽고 들어가고 있다. 내가 다니는 신학부는 해석학을 가르친다고 하면 구약학자/신약학자와 철학자/조직신학자가 협업하여 수업에서 가르치곤 한다. 그러다 수업 중 갑자기 둘만의 토론이 시작될 때면, 클로렐라 같은 학생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딴 짓을 하고, 철학자의 공세가 격해지면 이 신학자는 글쎄 유일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짓과 미소를 띄는 것이다. 내가 '해석'하기에는, '이봐 거기에 앉은 신학생 양반, 역..
논문을 쓸 때면 깊은 숲에 들어와 있는듯한 고요함을 느낀다. 실제로 이 장소는 깊은 숲과 같다. 삼나무처럼 곧고 지긋한 책들에 둘러싸여서 천천히 산을 오르듯 후설의 사유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적막함을 넘어서 고요함이 시작되면 내 영혼은 잠잠하게 빛난다. 늘 고요하게 내달리지는 못한다. 특별히 사람을 만나야 할 때 그렇다. 그럴 때마다 집 밖으로 달려나가지 못하는 큰 개처럼 끙끙거리곤 한다. 그런 나를 창조주는 무척이나 섭하게 여긴다. '자, 이제 제 일을 해야지요'라고 말하는 나에게 늙은 어머니만큼이나 서운해하시는 것이 느껴진다. 나의 것을 주장할 수록 당신이 머물 공간이 내 안에서 줄어든다. 선물로 받은 시간이 허다한데도 그 빈 공간을 스스로의 것으로 채우려고 고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항복하기 전까..
느리게 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느린 시간을 보내야만 했었던 걸까? 그것이 어쩔 수 없음이었다면, 그것은 변명이 아닐지는 모르나, 허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 고치를 탈피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온도가 쌓이며 나를 품어야만 했는가. 분명한 것은 그 품어짐으로 인해 나도 다른 허물들을 조금이나마 품는 법을 배우고, 느리지만 함께 그 시간을 통과하는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 애초부터 잘 달리는 경주자였다면 주위를 둘러보는 긍휼이 내 안에 싹 틔울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지금의 시점은, 이러저러함의 시덥잖음들을 조금은 시원하게 벗어던질 때라는 것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느리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속도를 찾고 싶었다. 나는 느린 사람인가, 빠른 사람인가. 나 자신 안으로 천착할 때에..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삶은 참 외롭고 슬프다. 다른 이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데 '먼저 네가 가면을 벗어야지' 하고 말하신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단순하게 대답한다. 그러나 재차 물어보신다. '정말 그러기를 원하니?' 질문의 내용과 상관없이 물음의 중첩은 나를 베드로처럼 주춤하게 만든다. 그 뒤에는 통상적 이해를 넘어서는 무거운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면은 꾸미고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가면을 벗는 것은 페르소나를 벗는 것이다. 단단하고 견고한 동일성의 자아가 철저히 무너지는 경험을 하는 것. 더 이상 어떤 위상도 점유할 수 없으며 무력하게 무대에서 내려와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가야 함을 의미한다. 가면은 빛을 반사하는 얼굴 있음의 상태이다. 그러나 가면을 벗는다는 것은 본연의..
아침 기도회 후에 아내를 위해서 가을 꽃을 샀다. 집에 돌아와서 줄곧 설교를 작성했는데 계속 고쳐나가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체력이 부족해서 그러지 못했다. 찬양 인도를 위한 콘티를 준비하는데 빛에 대해서 찬양하라는 마음을 주셨다. 기타를 치면서 한 곡씩 준비하는데 유독 힘이 달렸다. 특별히 힘이 달리는 곡이 있어서 빼두었다. 힘이나 능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동행으로 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콘티를 구성하고 나니 힘이 달리던 곡을 마지막에 자연스럽게 위치시키게 되었다. 기도회 준비를 하고 나니 한 시간 정도 짬이 났다. 자꾸 무언가를 주를 위해서 해야 한다는 경직된 자세를 내려놓고, 에스프레소를 리스트레토 정도로 내려서 작은 발코니로 난 문지방에 걸터앉아 햇볕을 쬐고 바람을 쐬었다. 사람은..
나는 보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나는 말테 브리게처럼 보는 법을 배우는 편이 아니다. 내 시선이 힘적인 것이 아닌 부드러운 어떤 것에 의해 풀려짐을 경험한 이후로부터, 시선의 변경이 인식론이 아니라 존재론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를테면 시야가 열리는 체험. 역설적으로 그러한 경험은 불안한 자기 존재에 대한 수용에서부터 개시된다. 스스로의 그러함이나 이러저러함에 대해 눈을 감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스탠스 자체가 존재의 허약함을 보여준다. 치달리는 처연함이 강한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강함에 대한 사유가 힘과 의지의 층위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흩어지는 시간을 끊임없이 끌어모으며 앞을 지향하지만 속절없이 다시 흩어짐을 경험하는 하이데거적 시간의 극복은 힘적인 용기와는 전혀 다른 편에서 기획되어야..
나는 깨지기 쉬운 그릇이다. 그게 금식 중의 나의 고백이다. 사실 금식에의 단행은 사소한 개연성의 틈으로 들어온 우발적 사건에 가까웠다. 지인이 하기로 했(다고 오해했)던 릴레이 금식이 구멍이 나 버려서 그 커다란 공허를 자기가 (뭔데) 채워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지 또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지금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 영적 씨름하는 것을 고스란히 함께 체험할 때가 종종 있다. 예배를 인도하기 전이나 공동의 예배에 진입해야 할 때는 몸살을 앓듯이 무거운 무력감을 느끼곤 한다. 부단히 씨름하는 것은 그래서 그저 존재하기 위한 발버둥 같은 것이다. 그리고는 조각 조각 부숴져 시간을 하염없이 땅에 게워내며 연명할 때도 많다. 쉼 같은 것도 사실 잘 모르고 어떻게 넘어지지 않고 달려야 하는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