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오랑쥬 껍질 씹기 (170)
저녁의 꼴라쥬
북해에 다녀왔다. 바다 앞에 서면 사람의 마음이 회복이 된다는 연구결과를 보고 난 후에 점점 바다를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북해의 분위기는 대체로 비슷하다.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의 북해처럼 독일의 북해도 망망하게 푸른 바다가 지닌 결연함 같은 분위기가 있다. 항구로 들어오는 덴마크 배를 보면서 두시간 거리에 있는 건너편 땅을 상상해본다. 해변은 땅이 끝나는 곳이지만 동시에 생명의 원천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바다에 발을 담그고 나의 작음과 창조주의 크심에 대해 묵상해보았다. 매순간 부지런하게 몰려오는 파도가 해변을 늘 새롭게 갈아엎는다. 모래는 매번 부드럽게 깔리는 융단 같아졌고, 나는 그 길 위를 하염없이 걷는다. 사람들도 모두 바다가 만든 부드러운 길 위로 걷고 있다. 어느순간..
라이프치히에 다녀오면서 흰 면티셔츠를 여섯 장, 양말을 다섯 켤레 사왔다. 덕분에 색이 누렇게 될 때까지 입어왔던 면티셔츠를 몇년만에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세 장에 9유로 하는 면티를 사도 기분전환이 되고, 솟아오르는 분수대에 발만 담그고 있어도 기분전환이 된다. 사실 전환이라는 것은 거창하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굳이 마르세유나 코펜하겐 등을 행선지로 잡고 검색을 시작한다. 그러나 거창한 것들은 또다른 자원들을 소진하지 않던가. 파리 워크샵을 다녀온 것은 그것을 준비하기 위한 기간을 포함해서 물질과 에너지를 많이 소비해야 했다. 이번 달에 있을 국제 컨퍼런스 발표를 준비하면서도 나는 또 그만큼의 시간적 자원을 소비하는 중이다. 그것들은 내 논문을 위한 생산적 전환점이기도 하..
학회가 끝나고 난 후에 나는 이것이 이루어야 했던 어떤 목표 같은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에는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이 0에서 1로 나아가는 듯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세계 안에 들어서게 되면, 1은 2가 되어야 하고 2는 3이 되어야 함을 배우게 된다. 태아였을 때에는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일생일대의 목표 같이 여겨지지만 태어나고 나면 자신이 자라나야 하는 아기임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주어지는 기회들과 더 큰 장으로 나아가기 전에, 내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전장에 나가는 것이 용맹한 것이 아니라, 내가 전장에 나아가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나는 무엇에 능하며 무엇이 취약한지를 자기 객관화가 주는 지..
파리의 공기는 무겁고 부드러운 벨벳 같았다. 빼곡하게 노천 카페에 앉은 사람들, 신호등을 무시하는 사람들, 뜨겁게 타오르는 도시의 건물들. 나의 숙소는 Saint Jean-Eudes라 하는 카톨릭 수도원이었다. 방은 작았고 화장실은 복도 끝에 있었으며, 창문을 열면 길 건너편으로 육중하게 솟아오른 Sante 감옥의 담벼락이 보인다. 담벼락 위로 사람들이 소리치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다. 수도원과 감옥과 교회와 신학부 건물은 서로 이웃하고 있었다. 나는 장염에 걸렸고 죽을 먹고 쌀밥을 먹으며 그저 낫기를 기다렸다. 상당부분을 부재한 어떤 것을 기다리는 시간으로 보냈다. 루프트한자는 아기의 유모차를 비행기에 싣지 않았고 우리는 아이와 함께 감옥 옆의 가로수 길 사이를 거닐고 집에 돌아왔다. 어딘가로 멀리 ..
허리가 아파서 후설 수업에 참여하지 못했다. 근력 운동도, 스트레칭도 쉼과 같이 가지 않으니 자기 혹사가 되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예나에 가는 대신 바이마르의 도서관이 문 여는 시간에 맞추어 가서 개인 방을 얻어 학회에 발표할 내용을 연구하기 위해 리쾨르를 읽었다. 한국어로, 독일어로 그리고 프랑스어로. 사실 학회 참여가 결정되고 나서도 발표 준비를 구체적으로 하지 못했었다. 이번 학기에 예나에서 수업을 꽤 많이 듣고 있기 때문이다. 일년 정도 남은 유학생활을 알차게 보내고 싶어서 여러 수업을 듣고 있었다. 실제로 후설 수업은 나에게 너무도 큰 지적 훈련이 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한계 상황 가운데에 있다. 허리 통증은 가시지 않고, 읽을거리를 다 준비하고도 차마 기차를 탈 수가 없었다. 나는 꿈 속에..
참 이상한 일이다. 성금요일에 나는 철저히 불가능성 앞에 서 있었다. 재를 뒤집어 쓴 심정으로 철저히 nobody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불 탄 바로 그 자리에서 보석을 발견했다. 논문 막바지에 들어서면서 사실은 방향성과 의욕을 많이 상실해버린 상태였다. 마지막 챕터에 들어갈 내용은 이미 전 챕터에 다 있었고, 더 이상 무엇을 써야 할지가 막막했다. 내리막길을 자전거 위에 앉아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나의 우울감은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오는 것만이 아니라 이미 연료가 다 타버린 듯한 심정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어려운 논리 연구 수업도 가기 싫고 김나지움에서 수년 간을 프랑스어를 배워온 독일 여대생들 사이에서 배워야 하는 프랑스어 수업도 가기 싫었다. 파울 틸리히 수업도 가기 싫었고 그냥 도서관..
나의 사랑하는 제자이자 내가 친구라고 부르는 어떤 이는 내가 걱정되는지 이따금씩 나의 감성의 안부를 묻는다. 독일에 와서 하는 연구나 또는 영적인 사역이나 모두 지성적인, 그리고 의지적인 부분에서의 강세는 가지고 있지만 그에 따라 나의 감성적인 부분은 조용히 비활성화될 때가 많다. 그는 나를 참으로 잘 알고 있는 나의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정체성이란 이중적이어서 (또는 그보다 더욱 다원적이고 복층적이어서) 내가 인지하고 있는 나라고 하는 사건의 종합과 다른 사람이 인지 또는 인정해주는 너라고 불리우는 (이때도 여전히 너라 불리우는 2인칭의 사람은 나라고 하는 1인칭과 겹침을 경험하는데) 사건의 종합 사이의 어떤 지표 같은 것이고 밸런스 게임의 한복판에서 갈등하는 존재일 것이다. 나는 재즈를 좋..
요즘은 시집을 구글 북스에서 구매해서 epub으로 변환하여 킨들에 넣어 읽는다. 지인에게 중고 서점에서 시집 열 권을 구해달라고 부탁하려다가, 조용히 유로화로 디지털화된 시집을 구매하였다. 공룡 기업에서 할인을 받아 시집을 결제한 데에 대한 죄책감이 조금은 든다. 시집 한 권을 팔아서 자신에게 500원이 돌아온다는 시인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무튼 시집을 디지털화하였다고 해서 시에 담긴 내용까지 데이터화되지는 않은 듯 해서 안도감이 들었다. 시가 주는 감동은 그대로였다. 새로운 방법론의 새순이 돋는다. 2022년에 쓰게 될 논문의 마지막 챕터는 리쾨르의 서사적 주체에 대한 내용이 될 것이다. 파리에서 여름에 열리게 될 워크샵에 스피커로 참석하기 위해 리쾨르의 책에 나온 아우구스티누스, 아리스토텔레스..
베르나워 강연원고로 잘 알려진 후설의 후기 시간이론은 그가 베르나워에서 보낸 2년간 집필되었다. 하이델베르크를 다녀오고 나서 사실은 그곳에서 하고 싶었던 것들, 산책, 커피, 숲 속을 거닐기, 현상학 자료 읽기 등이 후설이 그의 휴양지 베르나우어에서 했던 일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후설을 보자마자 이 인물은 중요한 사상가이다 라는 것을 간파했던 레비나스처럼 나에게 있어 후설은 매우 각별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레비나스의 꿈결같은 글쓰기보다 명징한 후설의 문체가 더 마음에 든다. 그래서 헬라어 시간보다 라틴어 시간을 나는 더 즐겼던 것 같다. 라틴어 문장의 모든 알파벳들은 저마다의 방향의 지향성을 정확하게 품고 있기 때문이다. 고꾸라지는 소유격, 직선적인 대격, 샘물 같은 탈격. 다른 ..
내가 현상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캠퍼스 워십 예배의 깊은 임재 가운데서였다. 그때 나는 성령의 인도가 나의 지향성을 이끌어 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성령은 나타나는 대상성Gegenseitlichkeit이다. 무슨 말이냐면, 나의 대화의 상대자가 되고 나Ich라고 하는 인격의 친구로서 너Du가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때부터였는지 나는 스스로에게 유폐되어 있는 생활을 그치고 나의 외부로 나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 신의 관점에서는 우연이 아닐 지도 모른다. 어째서였는지 그때부터 나는 개념 하나 모르는 현상-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상학의 현상은 단순히 나와 관련없이 일어나는 이상한 현상이 아니라 나와의 관련 속에 일어나는 사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