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오랑쥬 껍질 씹기 (170)
저녁의 꼴라쥬
equilibrium은 본래 라틴어로서, 평형을 뜻하는 단어이다. equal이라는 말은 동등한, 같은,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여기에 초월성을 뜻하는 접두어인 tran(s)를 붙이면 tranquility, 즉 평정, 고요함, 냉정 등을 의미하는 합성어가 된다. 그러니까 equilibrium은 실재하는 것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어떤 일치점을 지향하고 있다면, tranquility는 그것들의 조화와 균형이 어그러진 상태에서도 태연자약하게 또는 냉정하게 일관된 상태로 진행해가는 의미를 겨누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trans를 초-로 본다면 당연히 위로부터 오는 초월성의 힘으로 느껴질 것이고 어떤 것이 전이하는transitional 상태, 즉 전이적- 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시간과 역사에 대해 횡단적..
며칠 쉬었더니 편도선이 가라앉는다. 기쁜 일이다. 아픔은 몸이 보내는 정직한 신호다. 멈춰. 약을 먹고, 몸을 놓아두는 수 밖에 없다. 봉기를 진압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자연스러움만큼 좋은 것은 없다. 흘러가는 대로, 지나가는 대로, 놓치는 대로... 글을 쓰면서 말줄임표를 자주 쓰는 성격은 아니다. 아는 목사님은 늘 말줄임표를 글에 넣으신다. 그분에게 느릿느릿, '생활'이라는 것을 배웠다. 말을 고르면 고를수록 말이 고르게 고와진다. 그날 저녁에 또는 다음날 저녁에 자꾸 고치는 글은 정갈한 음식같이 한결 개운해진다. 말을 고르다보면 말을 꼭 줄이게 된다. 말 속에 불필요한 말들이 참 많다. 오랫만에 예전 살던 마을을 방문했다. 할머니는 여전히 정원을 바지런히 가꾸고 있다. 저 정원은 할머니의 세계..
제대로 한 것만 남는다. 지금까지 만난 나의 멘토 중 제대로 된 것을 전수해준 분들의 것만 나에게 남아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것밖에 전해줄 것이 없다. 올바르게 한 것만 가르쳐줄 수 있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나는 줄 수 없다. 그것이 어쩌면 바른 정신을 이어간다는 것일지 모른다. 정신은 이어가는 것이다. 내가 체험하고 경험한 것을 몸으로, 감각으로 기억해서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는 작업은 치열하게 벼려낸 이성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고민이 아니라 연구를 통해서 진척을 이루어야 줄 것이 있는 사람이 된다. 이런 층위의 생각을 하다가 다음 국면에는 저런 층위의 생각을 하는 것이 이제는 어색하지 않다. 젊을 때에는 한 바늘에 꿰어져야 그것이 옳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정직하고 투명하다면..
어깨가 많이 뭉치고 편도선이 부었다. 의지적으로 도서관에 안가고 집에 돌아왔다. 수요예배를 마치고 목이 간당간당하다 느꼈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쇼트가 온 메인보드처럼 뭔가가 끊어진 것만 같다. 태생적으로 느린 리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어찌하다가 꼭 리듬이 조급하게 엉켜서 몸이 고생한다. 효율보다 사랑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되뇌이면 뭘하나. 다음 주부터 또 한 달간 연구를 멈춰야 하는 일이 생겨서 현재 진행하는 것의 매듭을 짓고자 기어를 올렸었는데 차가 퍼져버린 느낌이다. 내 몸을 다루는 방식은 먼저는 가족을, 다음으로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내 몸은 타자로서의 나이다. 내 몸은 나와 협력하는 공간적 체계이다. 내가 조심해주지 않으면 그들은 나의 고집스러운 장..
프랑스어 수업에 다녀왔다. 5주나 빠졌는데 다행히 여전히 쉬웠다. 지난 주에 논문에 집중하려고 빠지게 되면서 아예 못 갈 각오를 했었는데, 그럼에도 가게 된 경위는 이렇다: 도서관 카페테리아 테라스에서 식사를 하는데 프랑스 가족이 내 테이블에 앉았다. 나는 커피를 가져오려고 내 가방을 좀 지켜달라고 했고, 다녀와서 merci, 라고 했을 뿐인데, '이 사람 프랑스어를 하네?'라고 서로 말하길래 '네, 아주 조금'이라고 말하면서 대화에 시동이 걸려버렸다. 그들은 리스트 음대에 다니는 아들을 방문하기 위해 Aix-en-Provence(아니 심지어 프로방스)로부터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기차를 타고 이곳까지 왔다고 했다. '너 세잔을 아니?' 응, 아주 좋아하지. 대화를 하는데 프랑스어를 향한 신의 윙크 같은 것..
누군가를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하다. 그러나 결코 그 엄정함은 사슬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판단하는 것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 무거운 긴장을 가지고 그는 몇 보 나가지 못한다. 나를 살리는 것은 나의 의도 죄도 아니요, 들려오는 말씀이다. 리쾨르가 말하였듯, 우리는 광야 한 가운데에서 뒤로 갈 수도 없고 앞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방위의 개념이 무색할 때에는 새벽별을 찾아야 한다. 나의 길은 내부의 기억도, 기대도, 직관도 아니요, 외부에서 들려오는 새로운 부르심이다. 그 부르심이 내가 된다. 그 부르심이 내가 된다.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것이 되지 못할 것이며, 내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을 피하지도 못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기호가 아니라, 저편에서..
나는 약했던 걸까, 외로웠던 걸까. 악은 선의 결핍된 상태라는 말이 있는데, 외로웠기 때문에 약하였던 것은 아닐까. 내 주위에는 약하지만 꿋꿋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꿋꿋이, 라고는 하지만 그 터질듯한 고통을 누가 감히 계량할 수 있겠는가. 나이를 불문하고 그렇게 울면서 지긋이 길을 밀고 가는 친구들로부터 나는 꽤 많은 것들을 배우는 중이다. 다 사람이다. 아픈 것은 아픈 것이고, 견디기 힘들면 울며 주저앉게 되는 그런 사람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나아가는 사람들의 어떤 결기로부터 나는 격려와 사랑이 담긴 음성을 듣는다: '혼자인 것처럼 포기하지 말아라' 나는 약한 나를 짓밟는 수레바퀴 밑에 깔리는 현실성을 당연히 여기며 살아왔다. 약함은 터져서 악함이 되고, 외로움은 응결되어 내 안에 냉혹함 ..
내가 아닌 모습이 되려고 하면 힘이 많이 들어간다. 반대로 내가 가야할 길이면 힘을 꼭 빼신다. 프랑스어반은 이상하게 빠질 일이 꽤 생기고 독일어에 더 집중하게 된다. (덕분에 여행 전에 이탈리아어를 공부할 여력이 생겼다.) 삶의 기름기를 빼는 것은 생각처럼 쉽게 되는 일은 아니다. 취미로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이유는 게임을 끊고 생산적인 취미를 가지기 위해서였다. 나는 키보드로 격투게임의 타격기 커맨드를 열심히 타건할 수도 있고, 같은 것으로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의 철자들을 조립할 수도 있다. 선택은 나의 자유에 달려 있고, 나의 원함에 달려 있다. 나의 옛 지인은 내가 강박적으로 게임을 지우(고 까)는 것에 대해 다소 냉소적이었다. '계속 다시 돌아가면서 그런 노력을 왜 해?' 그래, 그럴지도 모르..
모든 지혜자들의 공통점은 단순성에 있다.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단순성. "Gott hat den Menschen aufrichtig gemacht; aber sie suchen viele Künste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들은 많은 꾀를 낸다, 전도서 7:29)" 삶에 잡동사니가 많고 염려와 근심이 많음은 욕심에서 비롯된다. 욕심은 추구하는 것을 얻고자 꾀를 내고 꾀는 단순성을 복잡하게 일그러뜨린다. 욕심을 내려놓든지 평안함을 포기하든지 사람은 둘 중의 하나만 가질 수 있음에도, 사람들은 둘 다를 얻고자 해서 늘 넘어진다. 바울은 말한다: 모든 것이 가능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0:23-24). 하나님..
미니멀리즘 에세이를 듣는데 물건을 비운다고 저절로 삶이 변할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이 말을 듣고나니 오히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자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워가면서 단순성의 매력을 느끼기도 하지만 단순함이 좋다는 것을 알아서 비우는 것은 더 지혜로움의 결이 아닌가. 정직성과 지혜로움은 함께 간다는 잠언의 말처럼 단순성과 지혜로움은 해석학적 순환 안에 들어가 있다. 차라리 자유해지면 물건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쓰고 없어도 있는 것처럼 넉넉하다. 노트북의 내용을 가볍게 하였더니 삶의 공기질이 쾌청해져서 좋았다. 조이패드를 그래서 바자회에 내놓았더니 아무도 사가지 않았다. 녀석을 다시 집에 가져오는 것이 여간 내키지 않았다. 복잡하고 명민하게 문제를 풀려고 하면 계속 그 복잡성의 망에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