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교토에 갔던 일이 생각이 난다. 조용함과 한적함을 찌는 듯한 여름 중에 찾아 저가항공을 잡아타고 간사이 공항으로 향했다. 교토에서는 지인이 마중을 나오기로 했었지만, 일정보다 먼저 교토 역에 도착해버렸다. 무더운 한여름의 교토 중앙역 광장은 부산했으며 나는 이전에 가졌던 인상의 여정을 찾아 헐떡였으나 발견되어지지 않았다. 일행을 만나 버스를 타고 이동 중에도 나는 그 인상의 루트를 차창 밖으로 기를 쓰고 찾고 있었고 어디서도 추억은 발견되어지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나는 지금 라멘 집에 앉아 있다. 이 집이 맘에 드는 것은 블랙과 레드 컬러의 강렬한 일본적 대비와 더불어 쿨 재즈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고, 물 컵이 플라스틱이 아닌 유려한 글라스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강렬한 정갈함, 그것이 내가 교토에서 ..
우리의 마음은 자연과 같다. 그것은 나름의 체계를 지니고 있고, 또 자유롭다. 그리고 일종의 다스림 (돌봄)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돌봐주어야 한다. 너는 그것을 사랑을 가지고 돌봐야 한다. 머리는 가슴에 대한 청지기와도 같다.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이다. 우리는 때로 그것이 넘쳐날 때에 보살피기도 하지만, 제어하기도 해야 한다. 그것의 종이 되어서는 안되지만, 그것을 섬겨주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기억하라. 여전히 보살피는 동시에 다스리는 것이 청지기의 본분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다스리는 것이 보살핌을 앞서지 않으며 보살피는 것이 다스리는 것을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어떤 스위치 전환의 기점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낮과 밤의 기능과 역할이 다르듯이, 네 시즌의 역할이 다르고 계속해서 ..
새 사람은 오늘의 사람이다. 그는 어제와의 단절을 느끼는 사람으로서 오늘에 속한 사람이다. 그는 자아의 경향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물가에 뿌리를 내리고 오늘도 그 말씀으로 인해 새로운 경향으로의 촉발을 받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날마다 새롭다. 그는 오늘 전혀 다른 새로움 가운데 살아있게 된다. 옛 사람은 어제의 사람이며 과거형의 사람이다. 자아의 경향으로서 그 사람은 아래로, 자아 중심적으로 수렴되어지는 사람이다. 생명의 영과 사망의 육을 말할 때, 단순히 우리는 육체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한계성과 하늘의 무한성을 고려하여 유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느끼는 모든 상황과 긍정하는 사고체계와 긴장관계에 놓여있는 새로운 상황, 새로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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