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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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자유는 내가 그것을 붙들고 고집하지 않을 때 주어집니다. 내가 집착하는 순간 나는 자유가 아니라 구속을 체험합니다. 중독된 의존성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그 중독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영혼도 참된 자유를 원하지만 우리는 영혼은 곧 육신입니다. 육신은 여전히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묵상해보았습니다. 회개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죄를 이길 수 없고 도리어 죄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인간임을 자복하는 것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위로부터의 전적인 구원의 은혜가 우리의 일상에서 매일매일 필요한 죄인들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죄에 대한 중독의 의존성에서 하나님에 대한 자유의 의존성으로 돌이키게 해달..
바르트의 말대로, "사도직", "사자"는 우리의 정체성의 지평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정체성으로서 우리에게 부여된다. 우리의 내면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가 있다. 이 두가지 전혀 다른 정체성이 부딪혀 레슬링을 하고 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는 먼저 우리가 자유함을 입었다고 선포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죄책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그러나 해방에는, 다시 죄에 대한 방탕으로 빠질 수 있는 도랑의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해방 직후에 우리는 인도함을 받을 푯대가 필요한데, 이 푯대는 고정적이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이미 율법이 우리를 온전케 하는 데에 실패한 것을 통해 우리가 본 바 있다) 그러므로 이 인도의 푯대는, 율법과 같이 고정된 일차원적인 한 점으로서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타고 함..
어느 순간 자신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이유라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때가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선한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유는 내가 악하기 때문이라는 것까지 깨닫게 된다면 그는 이제 정직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대면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전에는 걷지 않았을, 수없이도 등을 돌리던 그 험난한 준령이 다시 눈 앞에 펼쳐짐을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넘어져 있을 때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일어설 수록 선명한 전망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알게 된다. 참으로 정직한 사람들만이 이 좁고 험한 길을 울면서, 울면서, 눈물로 씨를 뿌리고, 상하고, 깨지고, 구르면서 먼저 걸어가고 있었으며, 스스로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처럼 뒤에 남..
거대한 역사 흐름 안의 카이로스와 능력장이 있는가 하면, 개개인이 바이오리듬을 가지고 사는 것처럼 개별자로서의 개인의 삶의 주기에도 카이로스와 능력장이 주어지는 것은 아닐까? 확실히 지금은 은혜의 때이며, 자유의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다. 이 자유를 가지고 방종으로 내달리는 해프닝 또한 숱하게 벌어지고 있으나, 우리는 더 나은 성숙을 분명히 원하고 있고, 균형을 원한다. 그리고 이 균형에 대한 갈망은 자유에 대한 갈망만큼이나 큰데, 그것은 인간이 무한한 영혼과 유한한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이며, 고체와 같은 육신 안에 항상 활동하는 활력으로서의 액체들이 끊임없이 생동하며 흐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형태 안에 생동감이 담겨지는 것이 이 우주이다. 어떤 에너지이든, 그것은 질료를 통해서 운동이 현상으로서 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