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19/03 (18)
저녁의 꼴라쥬
오늘은 도서관에서 연구를 하다가 Mensa am Park에 가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지긋이 혼자 거니는데 해가 구름에서 나올때 나도 모르게 '아아'하며 무심코 소리가 나온다. 나무에서 움이 트고 순이 나는 것을 보았고, 공원 길을 따라서 산책하듯 멘자로 향했다. 파스타를 시키고, 샐러드로 올리브, 파프리카, 토마토, 피넛, 참치등을 담아왔는데 3유로가 조금 넘는 가격이 나왔다. 담백한 기분이 들었달까, 무튼 차분히 식사를 마치고 다시 공원 길을 따라 내려와 흐르는 강을 멍하니 바라보고 지근거리에 있는 도서관의 카페테리아에 고양이처럼 숨어들어가 온화한 할머니에게 커피 한 잔을 받아 홀짝거리며 창 밖을 보니 햇살 아래서 연인이 포옹을 하고 있다. 잘 조성된 공원 안을 거닐때면 나는 최초의 행복감을 느꼈던 ..
"여러분은 이 세대에 순응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의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스스로를 변화되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무엇이 하나님의 의도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선함인지,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게하는 것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온전함인지 판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히스기야의 타락은 풍성함에서 비롯되었다. 풍성함은 히스기야에게 축복이 아니라 독이 되었다. 삶에서 스스로 허리띠를 매지 않을때, 온갖 세상의 것이 흘러들어와 그의 정신을 혼탁하게 한다. 그래서 로마서는 „정신"을 새롭게 하라고 한다. 이성은 우리 삶의 키와도 같다. 언어와 의미가 거하는 곳이 우리 삶의 중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의 방향타를 바르게 하는 자는 생각과 혀를 통제하는 자이다. 지금의 세대는 건전한 이성보다는, 풍성한 감..
자격없음 때문에 버려짐의 경험을 한 아이는 커서도 그러한 문법에 갇혀 있을 수 있다. 그러한 문법으로 듣고, 그러한 문법으로 행동한다, 자기도 모르게.독일에 와서 역설적으로 경험하는 공간감 하나는, 아무리 느려도 괜찮다는 저편에서 들려오는 충만한 말과, 느리지만 정직하게 벽돌 한 장씩은 쌓아올릴 수 있다는 힘의 부여empowerment이다. 벽돌 한 장은 쌓을 수 있다. 이제 나는 예수의 가벼운 멍에로 새롭게, 다시금 돌아온다. 나의 연약함을 그대로 받으시는 주님, 그리고 그 연약한 자와 한 걸음씩을 '산책'하고자 하는 주님. 산책은 앞으로만 나아가지 않고 뒤로 갈 때도, 에둘러 갈 때도,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올 때도 있다. 그러나 산책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으며, 참으로 도구화되어지지 않는 여가이며..
지인과 카페에서 이야기하다가 무심코 책상을 스윽 쓰다듬는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커피 잔을 감싸쥐는 습관은 언제부터였을까? 잔 자체의 온도가 아니라, 뜨거운 무엇을 쥐고 있다는 데서 나는 묘한 위안을 얻는다. 나의 유년기는 서러운 겨울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차디찬 방바닥 위의 얼어붙은 개구리처럼 꼼짝을 못하고 수일을 버티다가, 횡단보도 건너 주유소에 기름통을 들고 가서 반정도 담아오면 그것으로 며칠을 버티곤 했다. 하도 기름을 오랫동안 넣지 않아 보일러가 망가진 날에도 내 기억에 아버지는 낙천적이셨다. 어두운 날에는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훗날 군에서 죽음 한발짝 옆에 살아가면서 깨달았다. 서러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면, 이상하게 저편에서 꼭 설레임의 아지랑이들이 피어오르곤 했다..
기도를 하다 문득 하나님의 사랑을 엄청나게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왕의 자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바다 속에 있는 것이나 하나님은 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다. 우리에게는 엄청난 자유와 권세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보라. 그는 모든 것을 누릴 권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스스로 누리는 것을 포기하고 철저히 그 권세와 자유를 남을 섬기는 데에 사용했다. 권세가 없어서가 아니라 바로 그 권세 때문에, 자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자유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길 수가 있는 것이다. 아들과 청지기는 하나이다. 깨끗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을 것이다. 이 정직함을 회복하는 순간 사람에게는 느부갓네살이 총명을 다시 회복하듯 하나님의 영이 다시 부..
프랑스어가 중급 정도 되니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아무리 좋아하는 것도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음을 깨닫는다. 제랄드 메이가 사람들이 사랑을 피하고 효율성을 택하는 이유를 사랑이 수반하는 vulnerability 때문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본다. 내가 벌거벗겨지고, 연약함이 그대로 노출되는 사랑. 사랑은 우리의 맨얼굴을 드러낸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해 십자가 위에서 뜨겁게 수치스러워지셨다. 한 교인이 일전에 나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초라하게 살지 말라"고 충고한 일이 있다. 당시의 나는 이 맥락이 아버지를 빗대어 말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 말을 아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다르다. 아니오, 저는 초라하게 살 것입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을 초라한..
"사람은 시인으로 이 땅에 산다" (dichterisch wohnt der Mensch). 시를 짓는 것이 단순히 헤매는 것이 아니고 건설을 통해 방황을 끝내는 것인 한, 시는 사람이 이 땅에 살 수 있게 해준다. 그러려면 언어와 나의 관계가 바뀌어야 한다. 언어가 말한다. 그때 사람은 언어가 자기에게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언어에게 답한다. 그래서 훨덜린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시인으로 이 땅에 산다." 하늘과 신을 향한 마음과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실존 사이에 긴장이 유지될 때, 사람은 비로소 산다는 것이다. 시는 시를 짓는 재주 이상이다. 포이에시스(poiesis), 곧 창조이다. 가장 넓은 의미의 창조이다. 그런 뜻에서 시는 본래의 삶이다. 사람은 시인일 때만 산다. (폴 리쾨르, 해석의 갈등,..
공연장에서 오랫동안 계속되던 박수를 내가 멈출 때 다른 사람들도 멈추는 시점에서 문득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나에게 공통감각이란 게 생겨난 것일까. 어릴적의 나는 분명히 공통감각과는 거리가 먼 예민함과 엉뚱함과 불안함이 뒤섞인 사람이었다. 수채화의 물통처럼 검고 혼돈한. 그때의 나는 언제 박수를 쳐야하고 언제 마쳐야 하는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무엇이 적당한 것이며 무엇이 넘치는 것이며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 모르는 아이였단 말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자유와 절제 사이에서, 어리석음과 지혜로움 사이에서, 엉뚱함과 진중함 사이에서 나의 길이 형성된 걸까. 내 삶이 리셋이 되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어린아이가 넘치는 감성을 가지면서도 언어를 훈련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