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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꼴라쥬
뽀송한 가지들 만개하지는 않는 꽃들 아직은 그래도 봄은 환하게 약한 것들을 격려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이 오늘도 반보씩 앞으로 간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연구하면서 중세 시대 신학자/철학자들의 아우구스티누스 주해를 함께 보는데, 오늘 발견한 인상깊은 부분은 "흘러가는 시간은 비존재가 아니라 연약한 존재"라는 말이다. 봄에 피는 벚꽃을 보며 일본사람들은 아름다움과 덧없음을 함께 생각한다고 한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꽃잎들이 피자마자 땅에 떨어지는 것, 그 덧없는 아름다움이 일본사람들의 정서라고 나에게 일본인 교수님께서 말해주신 일이 있다. 그렇다면 봄이야말로 가장 덧없는 계절이 아닌가. 열매가 빨갛게 익는 뜨거운 여름도 아니고 원숙해지는 차분한 가을도 아닌것이 그저 피었다 지는 꽃들로만 가득한 이 계절의 의미는 도대체 무얼까. 엘리엇의 표현과는 달리 4월은 잔인한 계절이 아니다. 겨울과 달리 고통의 계절도 아니고, 그저 생소한 새 생명으로 가..
4시까지 연구를 하다가 머리 속에 부드러운 것이 다 고갈된 상태가 되어서 커피를 한잔 마시러 도서관을 나섰다. 커피를 다 마시고 건너편에 화랑이 눈에 띄었다. 유화 그림들이 차창 안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색이 있는 것들을 보면 이상하게 위로를 받는다. 나는 내 그림에 색을 칠한 적이 없다. 색감은 정서나 기분을 표현하는 것인데 나는 줄곧 스케치만 해왔었구나. 나의 고모는 화가였다. 고모가 마당 벽에 커다랗게 유화를 그렸을때, 그것을 보고 최초로 그림을 멋지다고 느꼈다. 당시의 나는 초등학생 아니면 중학생이었고, 고모는 정원사처럼 회색 벽을 초록 정원의 나무와 강으로 수놓았다. 내가 그림을 들고 가서 보완해야 할 부분을 물으면, 고모는 그냥 그대로가 좋다고 늘 말했다. 그냥 그대로가 좋다고. 카페 건너 화..
"우리는 그 다음 논지를 잘 알고 있다. 즉 현상적인 속박이 없는 순수한 초월적 관념으로서 자유는 스스로 인과적 연쇄를 시작하는 능력의 궁극적 의미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초월적 자유를 토대로 자유의 실천적 개념이, 다시 말해 감각 성향들의 제약에 대한 의지의 독립성이 성립된다." Kant, Critique de la Raison pure, A. Tremesaygues et B. Pacaud, 리쾨르의 타자로서 자기자신 150-151에서 재인용. 리쾨르를 읽다가 최근에 고민하고 있는 자유 개념에 대한 사유의 비슷한 궤적을 만나서 놀라고 있는 중이다. 다름 아니라 칸트의 무제약자l'inconditionné의 개념과 관련하여, 인간이 현상들의 인과관계의 망 안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사실은 그 인과..
불꺼진 방 나는 아직 눈을 뜨고 있다 전파를 찾는 티비처럼 웅성거리는 수억의 빛의 파편들 유년기에 어머니가 방의 불을 끄면 묻곤 했다 이게 뭐죠 아직도 내 눈에 뭐가 보이는걸요 하얗고 작은 것들이 천정에서 우글우글거려요 주파수가 어슴푸레 잡힌 라디오처럼 어머니는 잠결에 말했다 얘야 그건 네 생일이란다 내 생일이요? 내가 태어나던 날 빛과 어둠이 씨름하던가요 오래된 전축처럼 흐릿함 중에 선명한게 나오던가요 뽀송해지는 봄 가지들처럼 그렇게 눈물겹게 반갑던가요 나라는 것이
여행을 다녀오니 벌써 4월이다. 나무에서는 초록 잎새가 몇주만에 만난 아이처럼 훌쩍 돋아나있고, 흐린 날에도 제법 선선하다. 아침에 지인과 대화하면서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주는 쓸쓸함과 그 채워지지 않는 무엇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비슷한 연배여서인지 오랫만에 깊은 부분이 다루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같은 책을 여러번 반복해서 읽는 편인데, 어제 읽은 책에서도 인간이 본질적으로 emptiness를 가지고 있는 vulnerable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권면하고 있었다. 그 공허함이 채워질 것만을 기대하는 것은 집착이지만, 그것을 희망하는 것은 사랑이고 동시에 기도이다. "주여 나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 참으로 존재하게 도와주소서" 아우구스티누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우리에게는 ..